2012년 6월 13일 경기 안산시 고잔동의 한 새마을금고로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발신자는 한참 떨어져 있는 전남 영광의 새마을금고였다. 이 새마을금고에서 발행한 자기앞수표 2장이 전남 영광에서 사용됐는데 뭔가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이 수표는 폐기 처리됐어야 하는 이미 한번 사용된 수표였다. 불과 5달 전인 1월 10일 고잔동 새마을금고 9곳이 모아 폐기를 의뢰한 70만3747장에서 빠져나간 것이었다.
이것을 시작으로 이듬해 3월 12일까지 5건의 신고가 들어왔다. 사용된 수표는 모두 폐기 의뢰를 했던 그 수표였다. 당시 새마을금고 측은 폐기를 의뢰하면서 수표 전면에 특정횡선을 긋거나 도장을 찍어 재사용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렇게 한 뒤 경기도 화성의 모 파쇄업체에 보냈다. 다만 일부 수표에는 구멍을 뚫는 ‘천공’ 처리를 하지 않았다. 부실한 처리가 불거지면서 당시 새마을금고 측 실무책임자가 직위해제를 되고, 담당직원은 징계를 받았다.
그 뒤로 폐기 수표는 더 이상 발견되지 않았다. 어떻게 유통됐는지도 추적할 수 없어 사건은 미궁에 빠졌다.
그리고 1년 6개월이 지난 지난해 10월 1일, 문제의 그 수표가 다시 등장했다. 6개월 동안 서울 종로·동대문구 귀금속 상가, 경기 수원·일산 등에서 잇따라 신고가 접수됐다. 경찰은 수사 끝에 폐기 수표를 사용한 일당을 붙잡았다.
2012년에 문제가 됐던 그 폐기 수표였다. 서울 혜화경찰서는 사용 후 폐기 의뢰된 수표를 가로채 명품 시계와 다이아몬드 등 사치품을 구입한 혐의(사기)로 보석중개업자 조모(62)씨 보석감정사 정모(64)씨를 구속했다고 23일 밝혔다. 조씨 등은 지난 8일까지 시가 1500만원 상당의 유명 브랜드 시계 3개와 시가 6000만원 상당의 9.37캐럿 다이아몬드 등을 사는 등 1억4000만원 상당의 폐기된 수표를 쓴 혐의를 받고 있다. 1000만원 수표 3장, 100만원 수표 25장, 10만원 수표 101장과 다이아몬드 등을 압수했다.
경찰은 폐기 수표에 그어진 특정횡선이나 도장자국을 약품으로 지웠다고 본다. 구멍이 뚫리지 않았기 때문에 새 것처럼 쓸 수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100만원 수표 2장을 현금입출금기에 입금해보기도 했다. 바로 다음날 폐기 수표로 판명되면서 실험은 실패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폐기업체로 간 수표가 시중에 나오게 됐는지는 오리무중이다. 어느 정도 규모의 수표가 빼돌려졌는지도 불분명하다. 경찰이 조씨 등을 검거했는데도 폐기 수표 사용 신고는 쇄도하고 있다. 조씨 등은 경찰조사에서 “같이 살던 조선족 여성으로부터 (폐기 수표)를 받았다”고 진술했다. 이들 일당이 2012년 폐기 수표를 처음 사용한 그 범인과 동일인은 아니다. 경찰은 공범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또 경찰은 폐기 의뢰를 받았던 파쇄업체 사장 최모(47)씨를 의심하고 있다. 최씨는 “당시 3.5t 트럭 한대에 수표를 싣고 와 절차에 따라 폐기했지만 라면 박스 3개(7000여장) 분량의 수표를 도난당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씨는 2012년 말에 파쇄업체 문을 닫은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 관계자는 “피의자들이 수표 출처에 대한 진술을 거부하고 있다. 횡선이나 도장 자국을 지운 수법도 말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경찰은 폐기 수표 유통경로를 추적하는 한편 폐기 수표 관리부실 실태도 수사할 방침이다.
황인호 기자 inhovator@kmib.co.kr
폐기 직전 도난 수표 7000장 행방은… 1억4000만원치 불법 사용 적발
입력 2015-04-23 2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