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 광화문 집회, 길 열어준 어린 경찰… 감정의 골을 트는 작은 배려

입력 2015-04-23 06:10

“광화문 차벽 너머의 세상, 우리는 이렇게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세월호 1주기 집회에 참여한 대학생의 글이 네티즌들 사이에서 급속도로 퍼지고 있다. 한 대학생일 뿐인 그는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 올바른 일이라는 판단 하에 광화문으로 나섰다.

경찰도, 그도 인간이었다. 몸이 아픈 사람을 배려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배려하고 싶어하는… 시위대의 건강을 걱정해 버스 차벽을 열고 가는 길을 열어준 어린 경찰의 얘기는 경찰과 시민, 화해의 방향을 보여준다. 물론, 근처에 있던 한 경찰은 그 어린 경찰을 나무랬다.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진정성,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억울한 일이 있다면 들어주고, 아픈 사람이 있다면 도와주면 된다. 소통이 단절되니, 간혹 그 간극을 이용하려 드는 사람이 생길 수 있다. 그 몇몇의 사람들로 전체를 매도해서는 안 된다. 사람과 사람의 진정성은 작은 배려에서 시작된다.


<전문>
광화문 차벽 너머의 세상, 우리는 이렇게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한 아름다운 학생의 글입니다.
밤이 왔다. 가슴이 아프다.
모든 일들이 다 꿈만 같다.
오늘의 나는 집에 왔고, 어제의 나는 유가족분들과 함께 광화문에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물고기 가두듯 버스로, 경찰 인력으로 가뒀다.
한 번 나가면 다시 들어올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고개를 숙이고 태양에 저항했다. 밤에는 무지막지한 추위가 우릴 공격했다. 유가족분들은 추우면 고생이라며 핫팩이고 담요고 먹을 것이고 늘 어린 나부터 챙겨주셨다.
한 번은 화장실이 너무 가고 싶어 밖으로 나왔다가 다시 못 들어오는 상황에 마주쳤다. 경찰들은 나를 본 척도 하지 않더라. 나는 어리고 약한 그들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어린 그들에게 사정했다. 도와달라고. 저 약한 사람들에게 가는 길 막지 말아달라고. 나이 많은 사람들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들이 날 도울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중 가장 나이 많고 높은 이가 날 앞에 두고서 제 병사와 농담 따먹기를 하며 웃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에게 무릎 꿇은 것이 아니라며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밀려드는 굴욕감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네 시간 정도가 지나자 온 몸이 사정 없이 떨리고 입에선 이상한 소리가 났다. 나는 슬슬 방패를 들고 나를 막는 그들이 원망스러웠다. 같은 서민의 자식으로 태어나, 우릴 돕기는 커녕 눈도 마주치려 않는 그들이 미웠다. 그래서 소리를 질렀다. 이 병력으로 아이들을 구하지 그랬냐고. 너희가 서민의 자식이 맞냐고. 어쩔 수 없다고 해서 잘못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나도 학생이라고 소리를 질렀다. 눈물이 사정없이 볼을 타고 흘렀고, 곧 한 두 경찰의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희대 대학생이며 어디 소속 분대장이라는 사람이 달려와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딱 봐도 어려보이는 사람이었다. 아마 그 방패를 쥐고 있는 사람들의 고참격인 사람이리라. 그는 내 몸을 걱정해 엠뷸런스를 보내주겠다고 했고, 거절을 하자 곧 보고를 드리고 유가족 계시는 쪽 길을 열어주겠다고 했다. 그리곤 내 손을 잡아, 날 일으켜 주었다. 나는 한없이 감사한 마음에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런데 그 옆에 있던, 내게 눈길 조차 주지 않던 아저씨 한 분이 내게 잔소리를 했다.
"우리가 그냥 안 열어주는 게 아니고, 불법 집회라 그런 거니까 다음부터는 합법적으로 하세요."
욕을 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리고 울면서 말했다.
"합법적으로 하기 참 쉽지가 않습니다."
그렇게 겨우 돌아가 유가족 분들과 밤을 지새고 다시 낮이 왔다. 여전히 덫에 걸린 쥐 신세다. 물자조달이 잘 안 되어 먹던 음식도 그대로다. 도시락은 다 식었고, 항의 끝에 겨우 설치된 이동식 화장실은 바꾸어 주지 않아 그 바닥으로 오줌이 줄줄 샜다. 밖과 유일하게 소통할 수 있는 핸드폰도 비상 배터리까지 모조리 떨어져 기자분의 것을 빌려야 했다. 거듭되는 경찰과의 마찰 중 한 어머니께서 쓰러지셨고, 어떤 분은 다치기도 하셨다. 쓰러진 어머니가 다치실까봐 옮겨달라고 소리쳤지만 경찰은 돕지 않았다. 시민들에게 우리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움직임은 계속되었다. 나는 갇혔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지만 별 수 없었다. 유가족 분들은 이미 여러모로 각오를 마치신 것 같았다. 위험하니 넌 뒤로 빠지라고 여러번 말씀하셨다. 내 자신이 너무 초라하고 무력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게 경찰과의 대치가 이어지다 지쳐가기를 한참.
"길 건너에 사람들이 오고 있습니다!"
멀리 길 건너에서 사람들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을 때, 그 요동침을 잊을 수는 없을 것이다. 버스에 가려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집회 함성 소리가 들렸다. 아마 경찰들은 저 집회에 참여를 시키지 않으려고 이토록 열심히 이들을 막았나 보다. 당장이라도 뛰어나가 그들을 반기고 싶었지만 참고 또 참았다. 우리에게는 이 자리를 잘 지키는 것도 중요했다. 허무히 내어줄 수는 없었다. 경찰들은 지금껏 내가 살면서 본 모습 중 가장 많은 인력이 배치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쉽사리 이중 삼중의 벽을 뚫지 못했다. 당연했다. 우리는 또 다시 몇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안 쪽에서 어떻게든 힘을 주려 소리를 지르고, 구호를 외쳤다. 함성을 발사하니 머리가 찡하고 어지러웠다.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모두 힘들고 지쳤지만 버티고 있구나. 그것이 죽은 자식들 때문이라는 생각에, 나는 몇 번이고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세종대왕 쪽 넘었답니다!"
한 유가족 분의 외침과 함께 저 멀리서 수십개의 깃발들이 보였다. 우리는 버스 틈, 화장실 창문, 버스 지붕 위로 올라가 그들을 기다렸다. 경찰들이 계속 인력을 올리고 차로 길을 막는 모습, 캡사이신을 군중에게 뿌리는 모습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나는 개의치 않고 앞으로 다가오는 그들이 진심으로 존경스러웠다. 그 깃발들 중에는 분명 내가 다니는 한신대학교의 깃발도 있으리라. 선배들에게 기다리고 있으라는 연락이 들어오자 모두가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 실감났다. 혼자 동떨어져 건너편에 있었지만 진짜 혼자는 아니었다. 경찰들의 진압과 경고 방송이 계속되었지만 사람들은 멈추지 않았다. 폴리스 라인이 무너지고, 또 무너지고... 어느새 몇 몇의 사람들은 버스 틈새를 이용해 우리가 있는 곳에 도달했다. 유가족 분들은 바닥에 돗자리를 깔아 그들이 다치치 않고 넘어올 수 있도록 도왔다. 대단했다. 한 번도 이런 광경을 마주한 적이 없었다.
사람들이 자꾸 넘어오자 경찰들은 아예 그 작은 틈까지도 막아버렸다. 도대체 저 많은 경찰들은 다 어디서 나타났을까. 나는 베터리 3퍼센트 남은 핸드폰을 들고 계속 연락을 기다렸다. 너무 심하게 막아 넘어올 수 없는 모양이었다. 한 학생회 친구가 일행들과 떨어져 넘어왔다고 했다. 경찰들은 이제 유가족이 있는 곳까지도 캡사이신을 뿌렸다.
연행을 할거면 진즉 하던지. 사람을 쥐처럼 가둬놓고 이제와서 범법자 취급하는 그들이 미웠다. 여론이 무서워 사람을 선택하지 않는 그들이 무서웠다. 우리가 지금 싸우지 않으면 언제 이 사람들이 다시 모여 우릴 돕겠어! 한 어머니가 울부짓듯ㅈ 소리치셨다. 유가족들은 마치 세월호라는 배 안에 갇힌 것만 같았다. 다른 어머니 한 분이 손을 잡아주시며 말씀하셨다.
"힘이 없어서 미안해."
그건. 내가 드리고 싶은 말씀이었다.
도무지 좁혀지지 않는 저항과 진압 속에서 우리는 타협을 보기로 했다. 다음에 또 만나기로. 잊지 않고 다시 싸우기로 타협했다. 어머니 아버지들은 경찰이 뚫어준 길을 통해 저 너머에 있던 사람들과 만날 수 있었다. 다시 만나서 다시 싸우는 걸 약속해 달라고, 그분들은 말씀하셨다. 그리고 시민들은 약속했다. 크게 소리질렀다. 나는 저 너머에서 날 기다리던 우리 학교 사람들과 만났다. 잘 돌아왔노라고 어깨를 쓸어주었지만 글쎄, 나는 도무지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분들은 이런 관심과 무관심의 싸움을 일 년 동안 하고 계셨구나. 나는 세삼,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집에왔다. 하루를 자고 저녁이 되었다. 얼굴은 온통 까슬까슬하고 정신은 멍하다. 어제의 일응 트라우마처럼 자꾸 잔상이 남는다. 이렇게 힘들어본 적은 없다는 생각이다. 내일 시험이지. 학교에 가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가혹하게 느껴졌다. 도무지 지금 짐을 챙겨 집에서 나올 정신이 없으니 월요일에 학교를 가야겠다 결론 내렸다. 시험이지만, 공부를 하나도 해두지 못했지만 도무지 정신이 없어 선뜻 일어나지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기억한다. 나를 기억한다. 보지 못했다면 그냥 그렇게 지나갈 수 있겠지만 나는 보았다. 국가가 우리를 얼마나 철저하게 무시하고 있는지. 나는 똑똑히 보고 느꼈다. 그랬기에 다시 일상에 적응하기가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이 일상이 얼마나 냄비 속 개구리 같은 일상인지 잘 알고 있기에.
비가 온다. 다행이 이제 온다. 어제 왔다면, 그저께 왔다면 퍽 힘들었겠다. 정말 하늘에 아이들이 있는 모양이다. 신발 치워두는 걸 잊어버렸는데 다 젖었겠지... 멍하니 방에 앉아 있다가 눈을 끔벅거린다. 그래.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생각이다. 역시
이번 시험은 망했다.

김동우 기자 lov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