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목항 세월호 유족들, 대통령 조문 단호히 거부

입력 2015-04-16 19:00

“대통령 왔다 가면 다시 올게.”

“어디 가시게요?”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거지.”

16일 오전 9시 전남 진도 팽목항의 컨테이너 숙소에 있던 실종자 가족 권오복(61)씨가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곧 떠날 거라고 했다. 권씨 말고도 팽목항을 지키던 세월호 희생자·실종자 가족들이 하나둘 자리를 떴다. 박근혜 대통령이 방문한다는 소식을 접한 뒤였다. 일부는 경기도 안산으로, 일부는 사고 해역으로 나간다고 했다. 모두 “개인적인 일을 보러 간다”고 했지만 이들과 오랜 시간을 함께 했던 자원봉사자 등은 ‘원치 않는 방문’에 대한 항의 차원이라고 했다.

곳곳에서 원망 섞인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순방이나 가라고 해.” “안산에나 가지 여긴 왜 와.” 세월호 참사 1주기를 앞두고 박 대통령의 해외순방 일정이 발표되면서 이미 희생자·실종자 가족들의 마음은 돌아서 있었다. 이들은 전날 저녁 늦게 박 대통령의 팽목항 방문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마음을 돌리기엔 너무 늦은 결정이었다.

썰물처럼 모두가 박 대통령 도착 전에 팽목항에서 빠져나갔다. 한 희생자 가족은 팽목항을 떠나면서 “박 대통령에게 ‘가족들 만날 생각 마시라’고 전해 달라”고 말하기도 했다.

설치된 뒤 단 하루도 문을 닫은 적이 없었던 팽목항 분향소도 임시 폐쇄됐다. 희생자·실종자 가족들은 분향소 문을 굳게 닫은 뒤 현수막을 내걸었다. 노란 바탕의 현수막에는 붉은 글씨로 ‘인양 갖고 장난치며 가족들 두 번 죽이는 정부는 각성하라!’고 적혔다. 현수막 앞에는 실종자 사진과 함께 가족들이 남긴 편지를 하드보드지에 적어 세워뒀다. 분향소 뒤편 실종자 가족들이 머무는 컨테이너 숙소에는 ‘진상규명 원천봉쇄 실종자들 피 말리는 대통령, 정부는 응답하라’는 현수막도 걸렸다.

이들은 추모식에 참석한 시민들에게 분향소 문을 닫는 이유를 설명하며 “미안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했다. 이어 “대통령과 모든 정치인들이 2014년 4월 16일 이전과 이후는 달라져야 한다고 얘기했지만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들 어느 누구도 295명의 희생자와 9명 실종자를 추모할 자격이 없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세월호 희생자·실종자 가족 중 일부는 박 대통령이 팽목항을 떠나고 2시간 정도 지나서 팽목항에 나타났다. 맑았던 날씨는 잔뜩 흐려졌고, 그들의 모습에도 착잡함이 진하게 묻어났다. “여기에서 오후에 추모식 행사를 여시는 분들 때문에 저는 먼저 돌아왔어요. 분향소는 내일 다시 열 거예요.”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황인호 기자 inhovato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