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잔뉴스] 4월… 슬픈 바다, 삼백넷의 꽃들을 기억합니다

입력 2015-04-16 13:19

진도 팽목항에 다시 꽃이 피었다. 1년 동안 바닷바람에 시달린 노란 리본은 빛이 바래 있었다. 잔인했던 그날이 다시 진도에 왔다.

15일 오전 9시, 295명을 앗아가고 9명을 집어삼킨 바다에 운무가 짙게 드리워졌다. 아들에게 줄 국화를 든 아버지, 딸에게 부칠 편지를 고이 접은 어머니가 출항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유가족들이 찾아간 수심 44m 세월호 침몰 수역에는 ‘세월’이라 적힌 부표만이 떠 있었다. “작년 이맘때였으면 좋겠어. 그럼 수학여행 안 보낼 텐데….” 고(故) 최윤민양의 아버지 최성용(54)씨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꼭 1년 전, 봄은 우리에게 고통의 계절이 됐다. 그 상처는 갈등에 휘말리며 덧나고 말았다. 유가족들은 여전한 아픔을 안고 다시 이곳에 왔다. 내년에도 후년에도 찾아올 봄은 이제 치유의 계절이 돼야 한다. 세월호 유가족이란 말이 ‘낙인’이 되지 않도록, 그들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모두가 동행해야 할 때다.




팽목항 방파제 끝 ‘기다림의 등대’에는 국화가 여럿 놓여 있었다. 아침부터 찾아오는 발길이 이어졌다. 진도 인근 섬에 사는 문윤홍(52)씨는 가족을 데리고 왔다. 문씨는 “한 바퀴 돌고 인사를 나누고 가야 마음이 편안하다”고 했다. 일곱 살 아들에게 형 누나들이 왜 이 바다에 잠겼는지 알려주고 “커서도 기억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실종자 가족들은 안면 있던 자원봉사자들과 재회했다. “언니,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반가움과 안타까움이 겹친 인사가 오갔다.

고통의 터널에 갇힌 사회에 필요한 것은 공동체의 따뜻한 이해와 배려다. 박종익 국립춘천병원장(강원대 의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은 “이제 우리는 세월호 앞에서 ‘잊지 않겠습니다’ 대신 ‘늘 함께하겠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고 했다.

“아빠 왔다, 잘 있니? 아빠는 안 울어”… 사고 해역 찾은 유가족들

‘휴∼’ 깊고 긴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단원고 2학년 2반 서우양의 아버지 조혁문(44)씨였다. 15일 오전 9시 진도군 관매도 인근 ‘그 바다’로 가는 배에 오르기 전에 내뱉은 감정의 조각이었다. 다른 가족들은 이미 배에 오른 뒤였다. “다른 가족들이 있잖아. 빨리 가슴에 묻어야 하는데…그래야 다른 가족도 덜 슬퍼할 텐데.” 행여 들킬까 보이지 않는 곳에서 깊은 한숨을 한 번 더 내뱉고서야 그는 배 쪽으로 걸어갔다.

사고해역으로 떠난 ‘한림페리 5호’에는 세월호 유가족 199명이 탑승했다. 2학년 1·2·3·8·9반 학생들 가족, 일반인 희생자 가족, 생존학생 가족 등이 배에 올랐다. 운무가 짙게 깔렸지만 날씨는 맑았다. 기온 9.2도, 풍속 초당 2m, 파도 높이 0.5m. 아이들이 잠든 바다는 잔잔했다. 하지만 남은 가족의 마음속 바다는 무섭게 출렁였다.

선실의 유가족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눈을 감고 있거나 고개를 푹 숙였다. 휴대폰에 저장한 사진을 보고 또 봤다. 단원고 2학년 8반 정수군의 아버지 최모씨는 아들에게 줄 국화꽃을 만지고 있었다. 둘째 아들은 형의 영정사진을 품에 꼭 안았다. 최씨는 “지금이 가장 힘든 때”라며 모자를 푹 눌러 썼다. 슬픔도 그렇게 꾹 눌러 담았다.

단원고 2학년 3반 윤민양 아버지 최성용(54)씨는 배 뒤쪽 갑판에 서서 먼 바다를 바라봤다. 큰딸이 동생 주라며 건넨 노란 국화 꽃다발이 손에 들려 있었다. “바다가 원망스러워요.” 최씨는 딸에게 고백하듯 말했다. “일상으로 돌아가려 부단히 애썼어요. 내가 세월호 유가족인지 모르는 곳에 가고 싶어서 직장도 옮겼어요. 그런데 한 달 만에 그만뒀어요. 일이 손에 잡히질 않더라고요. 유가족으로 산다는 게 이렇게 힘든 건줄 몰랐어요.”

1시간40분가량을 달려 사고해역에 도착하자 유가족은 모두 갑판으로 나왔다. 바다에는 ‘세월’이라는 글자가 적힌 노란색 부표 2개가 떠 있다. 스피커에서 실종자 이름이 한 명씩 흘러나왔다.

심장 깊숙한 곳에서부터 울음이 터져 나왔다. 막고 있던 댐이 무너지듯 봇물이 됐다. 시끄럽던 엔진 소리는 묻혀버렸다. 누군가 외쳤다. “아빠 왔다. 잘 있니? 아빠는 안 울어.”

꽃, 편지, 종이배 등이 바다에 안겼다. 단원고 2학년 2반 박혜선양의 어머니 임선미(51)씨는 빨간 주머니를 힘껏 던졌다. 빨간색은 혜선이가 좋아하는 색이라고 했다. 주머니 안에 가족이 쓴 편지와 임씨가 평소 아끼던 말씀카드를 넣었다. 끝내 쓰지 않겠다고 버텼던 박양 아버지의 쪽지도 들어 있었다. ‘혜선아, 보고 싶다. 미안하다. 지켜주지 못해서.’

임씨는 14일이 생일이었다. 지난해 생일에 미역국을 끓여주던 딸은 이제 세상에 없다. 손수건으로 입을 틀어막았지만 흐느낌은 커져만 갔다.

실종자 허다윤양의 언니 서윤(21)씨는 부표를 향해 손을 쭉 뻗었다. 조금만 더 뻗으면 동생에게 닿을 것 같았다. 동생이 좋아하던 사탕을 바다에 던졌다. 노란 국화와 편지를 동생에게 부쳤다. ‘어두운 곳에 오래 있게 해서 미안해. 우리가 조금 더 노력해서 빨리 나올 수 있게 해줄게…미안하고 많이 사랑한다.’

헌화식은 40분가량 계속됐다. 배가 부표를 천천히 선회하자 외침은 절규가 됐다. “다윤아, 많이 사랑해. 다음 생에도 동생으로 태어나줘.” 허씨가 동생에게 작별인사를 하듯 손을 흔들었지만 바다는 침묵했다.

유가족들은 한동안 갑판 위에 머물렀다. 난간에 몸을 의지한 채 바다를 바라보거나 그대로 주저앉았다. 바다로 뛰어들려 한 유가족도 있었다. 근처에 있던 유경근 4·16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이 재빨리 막았다. 유 집행위원장은 “1년이 지나도 진상조사나 인양 등 제대로 된 것이 없다. 추모만 하면 될 줄 알았는데”라며 “떠나간 이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진상조사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잊지 말아야… 그날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2014년 4월 16일, 세월호는 전남 진도군 조도면 서거차도와 맹골군도를 통과하는 바닷길 ‘맹골수도’에서 침몰했다. 오전 8시48분 왼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배는 1시간29분 만에 완전 전복됐다. 이때 기울기가 108도였다. 불법 증축, 과적, 평형수 조작, 고박 부실 등 위험천만한 조건을 모두 갖춘 배는 급격한 항로 변경을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이 참사의 직접 원인은 아니다. 선장과 선원, 해경 등이 필사적으로 승객 구조에 나섰다면 ‘전복 사고’로만 기록됐을지 모른다.

전남소방본부 119상황실이 단원고 2학년 최덕하(17)군으로부터 구조요청을 받은 건 배가 뒤집힌 지 4분 만인 오전 8시52분이었다. 전화를 넘겨받은 목포해경은 최군에게 “경도와 위도를 말해 달라”고 했다. 고등학생이 답할 수 있는 게 아닌데도 질문은 반복됐다. 1등항해사는 최군보다 늦게 제주VTS(해상교통관제센터)에 신고했다.

이준석 선장은 “구명조끼를 입고 선내에 대기하라”고 지시했다. 객실 승무원은 그대로 방송했고 승객 대부분이 따랐다. 기관부 선원들은 3층 선실에 집결했지만 승객 대피를 논의하지 않았다. 해경이 와서 구해주기만을 기다렸다. 옆 복도의 부상당한 조리원 2명도 방치했다.

교신 내용은 이들의 자격을 의심하게 만든다. 항해사는 오전 9시8분 진도VTS에 “움직이지 못한다. 어떻게 할까? 바다에 빠져야, 어째야 될지 모르겠네”라며 우왕좌왕했다. 진도VTS 측에서 “승객들에게 구명동의를 착용하도록 하라”고 하자 “방송이 불가능한 상태”라고 답했다. 거짓말이었다.

이 선장은 승객 대피명령을 내려 달라는 객실 매니저들의 요청도 묵살했다. 매니저 중 한 명인 박지영씨는 마지막까지 승객들을 돕다 숨졌다. 기관부 선원들은 오전 9시39분 해경 구조선이 도착하자 맨 먼저 탈출했다. 모두 신분을 숨겼고 이 선장은 속옷 바람이었다.

안전행정부 상황실은 현장상황을 청와대 위기관리센터장에게 문자메시지로 알렸다. 최군이 119에 신고한 지 39분 뒤였다. 오전 9시33분 세월호 인근에 도착한 해경 소형 연안경비정 ‘123정’은 선체 주변만 맴돌았다. 해경 헬기도 마찬가지였다.

세월호는 빠르게 가라앉았다. 오전 9시47분 3층 난간이, 3분 뒤 4층 난간이 완전 침수됐다. 박근혜 대통령은 오전 10시15분 “단 한 명의 인명 피해도 발생하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세월호는 2분 뒤 완전히 뒤집혔다. 선수 일부만 수면 위에 남았을 때에서야 해경 특공대와 잠수요원, 해군 해난구조대가 현장에 도착했다. 해난구조대는 잠수장비를 휴대하지 않아 이날 저녁까지 구조작업에 참여하지 못했다.

강창욱 기자, 진도=황인호 기자
영상=이미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