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수사는 세 방향으로 진행됐다. 사고 이튿날인 4월 17일 광주지검에 합동수사본부가 꾸려졌다. 사고 원인 조사가 임무였다. 수석비서관회의 전날과 당일 두 곳에 수사팀이 더 차려졌다. 인천지검에는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 일가를 표적으로 하는 세월호 실소유주 비리 특별수사팀이, 부산지검에는 해운업계 비리 특별수사팀이 구성됐다.
그러는 사이 진도 앞바다에서는 실종자 시신이 잇따라 물 위로 나왔다. 실종자를 찾고, 사고 원인을 찾고, 사고 배후를 찾는 일이 동시다발로 진행됐다. 검찰 수사가 여러 갈래로 진행되자 국민이 눈을 돌릴 곳이 많아졌다. 한편으로 안타까운 심정에 차가운 바닷속 실종자 수색 작업을 지켜보며, 다른 한편으로는 유병언 일가 수사를 주목했다. 국외 재산도피, 탈세, 비자금, 특혜 대출 등 참사와의 관련성이 알쏭달쏭한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화를 낼 대상을 찾던 국민의 분노가 그들에게로 향했다.
같은 해 5월 19일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도 진상규명보다 ‘문책’ 중심이었다. 박 대통령은 안전행정부와 해경을 해체하겠다고 했다. ‘관피아’(관료+마피아)를 척결하고 공직사회를 개조하겠다는 입장도 밝혔다. 진상규명은 순서가 뒤로 밀렸다. 박 대통령은 유족이 요구한 특별법 제정과 특별검사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법을 만드는 건 국회의 일이었다. 7개월 진통 끝에 특별법이 제정됐지만 현재 상황은 ‘눈물의 대국민 담화’에서 더 진전된 게 없다.
정부의 진상규명 활동은 검찰 수사와 감사원 감사를 통해 진행됐다. 10월 6일 발표된 수사 결과는 유가족을 납득시키지 못했다. 유가족은 이튿날 사고 원인이 여전히 불명확하고 구조 실패의 책임도 제대로 가려지지 않았다는 입장을 내놨다. 감사원은 주로 참사에 대응한 공무원의 잘잘못을 따졌다. 검찰과 감사원 발표에서 비슷한 사고를 막을 재발 방지책은 보이지 않았다. 국회에서도 90일간 국정조사를 했지만 청문회가 한 번도 열리지 않고 끝났다.
참사 98일 뒤인 같은 해 7월 22일, 전남 순천의 매실밭에서 발견된 시신이 유병언 전 회장으로 드러나자 국민은 허탈해했다. 사건의 모든 책임을 져야 할 것 같았던 대상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후 여론은 방향을 잃고 제멋대로 나뉘었다. 여러 세력이 ‘세월호 책임공방’에 끼어들었고, ‘세월호 피로감’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여론의 분열은 ‘일베’ 회원의 극단적 행동을 계기로 정점으로 치닫게 된다. 세월호 유가족이 특별법 제정 등을 요구하며 단식농성을 벌이자 그들은 현장 주변에서 음식을 입에 넣었다. 이들의 행동은 진보·보수세력 모두에게 비판을 받았지만 결과적으로 세월호 유가족에 비판적이던 사람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하는 도화선이 됐다. 무슨 말을 하든, 무슨 행동을 하든 ‘폭식시위’보다 욕을 더 먹지는 않는 상황이 조성됐다.
세월호 유가족의 택시기사 폭행 사건이 일어나면서 공개적으로 유가족을 질타하는 목소리까지 등장했다. 일부 보수단체는 대놓고 농성 중단을 요구했다. 세월호 유가족을 진보세력이나 종북세력과 연관지으려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이렇게 세월호 참사는 우리 사회에 내재된 ‘이념의 고리’와 만난다. 무슨 이슈든 불거지기만 하면 진보·보수의 대결로 변질시키는 기형적 메커니즘이다.
참사 수습을 둘러싼 분열과 갈등은 현재진행형이다.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의 역할과 기능을 대폭 축소한 특별법 시행령 안을 놓고 특조위·유가족과 정부가 맞서고 있다. 선체 인양 문제도 대통령이 ‘적극 검토’ 입장을 밝히기 전까지 소모적 논쟁을 치러야 했다. 일부에서는 인양과 배·보상을 예산·비용 차원의 문제로 접근해 갈등을 확산시키고 있다. 전문가들은 지금이라도 정부가 ‘사고 원인 조사와 대책 마련’이라는 본질로 돌아가야 분열, 갈등이 완화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권기석 박세환 기자
영상=이미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