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돈’ 전락한 서민전세자금… 허위서류로 160억 대출

입력 2015-04-06 21:21
송모(40)씨는 지난해 6월 알고 지내던 소모(35)씨로부터 제안을 하나 받았다. 송씨 소유의 서울 강서구 빌라를 전세 놓는 척만 해주면 주택전세자금 대출을 신청해 대출금을 나눠 주겠다는 것이었다. 보증은 한국주택공사가 해주기 때문에 빚을 갚을 의무도 없고 공짜로 돈을 챙길 수 있다는 말에 솔깃해졌다.

같은 달 중순 소씨의 소개로 한 사람이 송씨를 찾아왔다. 그와 함께 보증금 1억3000만원에 전세를 놓는 것처럼 가짜 서류를 썼다. 이렇게 작성한 허위 전세계약서와 근로계약서 등을 갖고 ‘또 다른 누군가’가 서울 중랑구 면목동의 기업은행 지점에서 8600만원을 대출받았다. 송씨는 대출금 중 500여만원을 받아 챙겼다.

이런 수법으로 금융기관을 속여 3년간 100억원이 넘는 서민전세자금을 빼돌린 일당 수백명이 무더기로 검찰에 검거됐다. 은행들은 허술한 대출 심사로 사실상 범행을 방조했다. 갈수록 심각해지는 전세난 해소를 위해 정부가 적극 지원한 자금이 ‘눈 먼 돈’이 된 것이다.

서울남부지검 형사5부(최성환 부장검사)는 각종 서류를 위조해 국민주택기금 등을 재원으로 하는 서민전세자금을 대출받아 가로챈 혐의(사기)로 총책 서모(51)씨와 부총책 최모(35)씨 등 123명을 구속기소했다고 6일 밝혔다. 허위 임차인 한모(47)씨 등 158명은 불구속 기소했고, 달아난 허위 임차인 한모(32)씨 등 107명은 수배했다. 검찰은 지난해 11월부터 지난 4일까지 6개월 동안 국무총리실 소속 정부합동부패척결추진단, 주택금융공사와 함께 수사를 진행했다.

서민전세자금대출은 집이 없는 서민들을 위해 정부가 보증을 서주는 제도다. 정부출연금으로 마련된 국민주택기금과 은행자금을 전세자금으로 대출해 주고, 주택금융공사가 대출금의 90%를 보증한다. 대출금을 내준 은행은 임차인이 돈을 갚지 않아도 주택금융공사 보증으로 많아야 10%만 손해를 보기 때문에 대출 심사가 형식적인 경우가 많았다.

서씨 등은 대출 광고를 보고 찾아온 사람들이나 노숙자를 가짜 임차인으로 내세웠다. 미리 만든 유령회사에 이들이 다니는 것처럼 꾸며 재직증명서, 4대 보험 가입증명서 등을 위조했다. 가짜 임대인 역할을 해줄 집주인도 모았다. 공인중개사들도 꼬드겨 가담시켰다.

이들은 가짜 임차인에게 허위 전세계약서와 증빙서류를 보내 은행에서 서민전세자금대출을 받도록 했다. 서씨는 이렇게 모은 돈의 일부를 공범들에게 나눠줬다. 임대인 모집책, 임차인 모집책, 서류 위조책 등으로 나눠 철저히 점조직 형태로 운영됐다.

검찰은 이들이 빼돌린 돈이 160억원에 달하며, 돌려받지 못한 피해액만 144억원 수준인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지난해 주택금융공사가 대신 변제한 돈이 2068억원이나 되는 점을 감안할 때 비슷한 범행이 더 있을 것으로 보고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제도상 문제점은 국토교통부 등 관계기관에 통보할 예정이다.

정부경 기자 vick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