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한국교회 최고령 목사를 만나다… 104세 김영창 목사

입력 2015-04-06 15:56
사진=강민석 선임기자
사진=강민석 선임기자
사진=강민석 선임기자
감리교 은퇴 목회자와 홀사모 58세대가 살고 있는 인천 남구의 연립주택단지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 원로원’. 한 건물의 101호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정장 차림의 노신사가 미소를 띠며 취재진을 맞았다. 취재에 동행한 조경열(62) 서울 아현감리교회 목사는 노신사의 손을 잡으며 인사를 건넸다.

“목사님, 돌아가신 아버님 성함이 김봉진 목사님 맞으시죠? 인천 강화에 살던 어린 시절에 몇 차례 뵈었습니다.”

“아, 그렇군요. 선친께서 돌아가신 지도 벌써 40년이 넘었지요.”

지난달 30일 만난 이 노신사는 한국 최고령 목회자인 김영창(104) 목사였다. 그의 생년월일은 1911년 9월 22일. 지난해 별세한 고 방지일 목사와 출생연도가 같다.

김 목사는 자리에 앉으며 보청기를 꺼내 오른쪽 귀에 끼었다. 그리고 100년의 세월을 넘나드는 이야기보따리를 하나씩 풀어놓았다. 3·1운동의 기억, 해방의 감격, 한국전쟁의 참상…. 그는 “많은 일이 있었지만 나는 언제나 행복했다. 내 곁에 항상 주님이 계셨으니까”라며 미소를 지었다.

김 목사가 지나온 한국의 근현대사

김 목사는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출신이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온수리 일대 논밭이 전부 우리 땅”이었을 정도로 부잣집 아들이었다. 8남매 중 둘째로 태어난 그가 3·1운동을 겪은 건 여덟 살 때였다. 1919년 3월 27일 온수리 성공회 교회 마당에서 ‘온수리 만세사건’이 일어났다.

“사람들과 만세를 불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흰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 100여명이 모였던 것 같아요. 한참 만세를 부르고 있는데 누군가가 와서 그러더군요. ‘사람들 잡으러 순사가 오고 있다.’ 곧바로 집에 돌아갔는데 현장에 남아 있던 7~8명은 잡혀갔다고 하더군요.”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건 이듬해부터다. 훗날 목회자가 된 아버지를 따라 피뫼교회(현 강화초대교회)에 출석한 게 하나님과의 첫 만남이었다. 어린 마음속에 신앙이 움트기 시작했다. 18세 때 그는 피뫼교회에서 세례를 받았고 이듬해 서울로 상경해 피어선성경학교(현 평택대)에 다녔다.

“아브라함 야곱 요셉 모세 …. 구약에 있는 큰 인물들 이야기가 재밌더군요. 이분들의 정신이 무엇인가 고민하다 보니 세 가지 결론이 나오더라고요. ‘첫째, 지혜로워야 한다. 둘째, 정직해야 한다, 셋째,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10대 시절에는 매일 새벽마다 뒷동산에 올라 기도를 드렸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이 사람들처럼 되게 해달라고. 그리고 이 세 가지를 염두에 두며 평생을 살았지요.”

김 목사는 피어선성경학교를 졸업한 뒤 인천 부평의 교육시설인 양정학원 등지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러다 당시 이 지역 감리사의 눈에 들어 1930년대 말 강화도 부속섬인 교동도로 파송돼 목회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광복을 앞둔 1944년에는 강화군 내가면으로 사역지를 옮겼다. 김 목사는 “해방이 되던 해에 겪었던 일도 참으로 다사다난했다”며 회상에 잠겼다.

“일제에 부역한 사람은 전부 죽이자는 분위기가 팽배했어요. 무서운 시기였죠. 그런데 마을 사람들이 저보고 (이러한 상황을) 수습하는 일을 맡으라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면 곳곳을 돌아다니며 강연을 했습니다. 새로운 나라 건설을 위해 과거는 잊고 한마음이 돼서 새롭게 출발하자고.”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도 위험한 순간을 맞닥뜨렸다. 전쟁이 터지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의 이야기다. 국군이 후퇴한 강화에 북한 인민군이 쳐들어왔다.

“인민군이 우리 집에 와서 ‘목사 나와’라고 하더군요. 인민군은 저를 마을 창고에 집어넣었습니다. 그곳엔 이미 다른 목회자 3명이 잡혀와 있었지요. 인민군은 교인 명부를 내놓으라고 했어요. ‘명부는 없다. 하루만 시간을 주면 내일까지 명부를 만들어주겠다’고 답했습니다. 인민군은 이 말을 믿고 저를 풀어 주었어요. 곧바로 가족들과 살섬(현 옹진군 시도)으로 도망쳤지요.”

“한국교회는 젊은이를 보듬어야”

김 목사는 전쟁이 끝나고 1959년 경기도 여주 여주중앙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해 79년까지 섬겼다. 은퇴 후에는 여주에서 농사를 짓다가 10여년 전 강원도 횡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아흔을 넘긴 나이였지만 이곳에서도 밭을 일구며 세월을 보냈다. 기감 원로원에 입주한 건 2010년 5월이었다. 농사를 더 짓고 싶었지만 기력이 쇠해 더 이상 땅을 일구는 게 불가능했다.

최고령 목회자임에도 김 목사의 ‘존재’가 교계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건 그가 이처럼 은둔에 가까운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김 목사는 95년 아내와 사별하고 혼자 살고 있다. 원로원에는 맏딸인 김애부(81) 권사가 틈틈이 들러 밥을 짓고 청소를 하며 아버지를 봉양한다.

김 목사는 7일 기감이 강화중앙교회에서 개최하는 ‘평화통일기념예배’에 참석한다. 그는 이 자리에서 민족화해와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메시지를 전할 예정이다. 김 목사는 “통일문제에 한국교회가 앞장서야 한다. 기도회에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는 기도를 드릴 생각”이라고 말했다.

“현재의 한국교회는 너무 세속화돼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젠 목회자를 신뢰하지 않아요. 무엇보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는 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교회는 젊은이들을 보듬어야 합니다. 이것이 제가 한국교회에 전하고 싶은 당부입니다.”

인천=박지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