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여운 남긴 차두리 은퇴 경기

입력 2015-03-31 21:42

거스 히딩크 전 한국축구 대표팀 감독은 2001년 10월 고려대와의 연습경기에서 범상치 않은 선수 한 명을 발견했다. 바로 차두리(35·FC서울)였다. 히딩크 감독은 경기 후 차두리에게 다가가 “경기가 끝났으니 돌아가도 좋다”고 말했다. 그러자 차두리는 유창한 독일어로 “난 우리 감독의 지시에 따르겠다”고 받아쳤다. 히딩크 감독은 당돌한 어린 선수에게 구미가 당겼다. 성실하지만 지나치게 수동적이고 자기 의사를 표현하지 못하는 보통의 한국 선수와는 달랐다. 차두리의 탄탄한 체격과 긍정적인 성격에 매료된 히딩크 감독은 곧바로 그를 대표팀에 발탁했다.

차두리는 같은 해 11월 세네갈과의 평가전에서 후반 40분 김남일을 대신해 교체 투입되며 A매치에 데뷔, 31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뉴질랜드전까지 76경기에 출장했다. 울리 슈틸리케 감독의 배려가 없었다면 차두리는 쓸쓸하게 태극마크를 반납할 뻔했다.

차두리가 2015 호주아시안컵을 끝으로 대표팀 은퇴를 선언하자 슈틸리케 감독은 “한국에선 선수의 은퇴 행사가 소극적”이라며 “관중석에 앉아 있다가 전반전이 끝나면 경기장에 내려와 꽃다발을 받는 것이 통상적이다. 팬들도 레전드를 떠나보내는 법을 알아야 한다”고 꼬집으며 차두리에게 은퇴경기를 선사했다.

많은 태극전사들이 은퇴경기가 아닌 은퇴식을 통해 팬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2011년까지 A매치 127경기에 출전해 5골을 넣은 이영표(38)는 2013년 11월 스위스와의 평가전 하프타임 때 은퇴식을 가졌다. 경기장을 찾은 3만6000여 명의 팬들은 그라운드로 종이비행기를 날리며 이영표를 떠나보냈다. 안정환(39)의 경우 2012년 2월 29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쿠웨이트와의 2014 브라질 월드컵 아시아지역 3차 예선전 하프타임 때 은퇴식이 진행됐다. 김태영(45·2005년), 김도훈(45·2006년), 유상철(44·2006년), 서정원(45·2007년) 등도 은퇴경기 없이 은퇴식에만 참가한 뒤 대표팀과 작별했다. 대한축구협회는 A매치 70경기 이상을 치른 선수가 은퇴할 때 은퇴식을 마련해 준다.

은퇴경기를 치른 태극전사들은 많지 않다. 홍명보(46)와 황선홍(47)은 2002년 11월 20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브라질의 친선경기에 마지막으로 나왔다. 홍명보는 선발 출전해 72분간 뛰었고, 황선홍은 후반 43분 교체투입 돼 마지막 투혼을 불살랐다. 이운재(42)는 2010년 8월 11일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가진 나이지리아와의 평가전에 출전한 뒤 태극마크를 반납했다. 2011년 아시안컵 이후 대표팀을 떠난 박지성(34)은 2014년 A매치가 아닌 K리그 올스타전에서 은퇴경기를 치렀다.

한바탕 잔치 같은 이번 은퇴경기는 긴 여운을 남겼다. 차두리에겐 큰 영광이 됐고, 대표팀에겐 하나로 뭉칠 수 있는 계기가 됐고, 팬들에겐 추억이 됐다. 슈틸리케 감독은 작은 결정 하나로 한국 축구에 큰 스토리를 만들어 냈다.

김태현 기자 taeh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