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싱가포르의 ‘국부(國父)’로 추앙받는 리콴유(李光耀) 전 총리의 장례식에 세계 정상들이 참여하면서 고인의 삶이 다시 한 번 조명받는 가운데 리 전 총리의 일본과의 ‘특별한’ 관계가 관심을 모으고 있다.
리 전 총리와 일본과의 인연은 ‘증오’로 시작했다. 1942년부터 3년여 간 일본군이 싱가포르를 점령하는 동안 리 전 총리는 개인적으로 학업을 중단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군의 잔혹함에 치를 떨어야 했다. 그는 훗날 회고록에 “일본군의 유일한 통치 수단은 공포였다. 그들을 증오했지만 탄압이 어떠한지를 알았기에 그 뜻을 거스르지 못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일본군 점령기를 경험하면서 그는 정치가를 꿈꾸게 됐고 ‘철권통치’ 철학을 체득했다. 그는 일본군 점령기에 암시장에서 위스키와 담배를 팔며 경제 현실을 체득했으며, ‘가혹하게 처벌하면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는 소신을 지니게 됐다고 회고록에서 밝혔다.
일례로 그는 일본군이 싱가포르에서 약탈자들을 사살한 뒤 시신의 목을 베 교차로 등지에 걸어 놓자 약탈행위가 사라지는 것을 목도했다며 “형벌은 범죄는 줄일 수 없다는 유연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나는 믿지 않는다”며 “이는 일본 점령기와 그 후의 경험에서 얻은 신념”이라고 회고록에 적었다.
총리가 된 후 그는 일본에 대해 철저히 실용주의적으로 접근했다. 1970년대 싱가포르 최초의 석유화학단지 건설때 리 전 총리는 하세가와 노리시게 당시 스미토모(住友) 화학 사장과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총리 등에게 협조를 요청했다. 또 세계적 허브공항인 창이공항의 관제탑, 금융가의 빌딩, 교통 시스템 등 여러 인프라 건설에 일본 기업들을 참여시켰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리 전 총리가 패전 후 일본의 재건행보를 높이 평가했으며 높은 근로의욕, 책임감, 동료의식, 인내심 등을 일본인으로부터 배울 것을 역설했다고 전했다.
반면 그는 일본에 ‘훈수’도 아끼지 않았다. 일본의 버블 붕괴후인 1990년대에는 “어중간한 시장개방은 일본에 비효율적”이라고 비판했다. 또 만년에 펴낸 책을 통해 일본이 외국인 인재를 받아들이는데 인색하다며 일본의 이민정책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종선 기자 remember@kmib.co.kr
리콴유 일본과의 '특별한' 관계…공포의 대상에서 벤치마킹, 훈수까지
입력 2015-03-30 0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