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란은 지난 24일 8~9년 전에 힘들었던 시절을 회상하며 그 당시 느꼈던 복잡한 심정을 장문의 글로 표현했는데요. 그 당시에 호란은 자기혐오와 자기연민이라는 양가적인 감정에 빠져 괴로워했는데 어느 날 점심 회식 때 우연히 어린 나무 한 그루를 보고는 지금까지의 자신의 생각을 고쳐먹기로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 나무는 대충 깎아 만든 각목에 의해 버티고 있었고, 부실하기 짝이 없었지만 몇 없는 짧은 가지 끝에 핀 어린 새순이 그녀에겐 남달랐습니다. 그 나무는 좁은 땅에 뿌리 내린데다 각목에 억지로 묶여 있었고 매일 자동차의 매캐한 매연을 들이마시고 살았지만 그 ‘고통’스러운 환경 속에서도 적응해서 살아남았습니다. 그런 나무를 보며 호란은 자신이 그동안 고통을 감성적으로만 생각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고통이 주는 신호를 받아들이며 살아날 방법을 모색한 나무처럼, 호란은 고통을 몸이 아파서 보내는 신호로 생각하며 자신이 실패했다는 열등감에 더는 빠져있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무조건 행복하고 긍정적으로 살면 성공이라는 메시지를 억지로 강조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고통과 불행이 이상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썼습니다. 그리고 호란은 “다시 날이 좋아 내 가지들이 덩굴처럼 기지개를 켜면서 새 이파리들이 날개처럼 돋아날 때 ’아, 이제 날이 풀렸구나.’ 생각하며 조용히 기분 좋을 수 있다면 참 아름답겠다”라고 쓰며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이처럼 고통에 대처하는 자신의 솔직한 자세를 담은 호란의 글에 누리꾼들은 “지치고 지쳐서 얼마나 어디까지 떨어질까만 재고 있었는데 위로받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요즘 제가 딱 그런 마음인데 위로가 되네요. 감사합니다” “요즘 제가 딱 그런 마음인데 위로가 되네요. 공유해놓고 자주 읽을래요” 등의 반응을 나타냈습니다. 공유도 350건을 넘는 걸 보면 두고두고 읽고 싶은 누리꾼들이 참 많은가 보네요.
봄은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이라고 하지요. 추운 겨우내 몸을 움츠렸던 나무도 그 껍데기를 벗겨내고 새순을 돋아냅니다. 아무리 힘들고 고된 세상살이라지만 계속해서 가지를 뻗치는 나무처럼 여러분도 몸을 일으켜 새로운 시작을 향해 가지를 뻗쳐보는 게 어떨까요?
호란 페이스북 캡처
다음은 호란이 올린 글 전문입니다.
한 8~9년 전쯤이라고 생각한다. 정신적으로 아주 피폐해져 있을 무렵이었다. 매일이 힘들었고 운전대만 잡으면 혼자 밀폐된 그 공간에서 크게 소리지르고 울면서 운전을 하며 다닐 시기였다. 스스로를 미워했고, 자기 자신에게조차 미움받는 나를 가여워했고, 그런 싸구려 자기연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내 모습을 또한 미워했다.
어느 날, 점심 회식이 있는 날이었다. 시기도 요맘때쯤. 봄바람이 불어 들어오는 2층 창가가 내 자리였다. 나는 영혼 없이 웃고 떠들면서 속으로는 웃고 떠드는 나 자신을 또 혐오하고 또 가여워하고 있었다. 그러다 창밖을 내려다 봤는데,
인도 위에 조금 드러난 땅뙈기에 가느다란 어린 나무 한 그루가 가로수랍시고 서 있는 게 보였다. 부실해 보이는 나무줄기를 대충 깎아 놓은 각목이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그 딱해 보이는 모양새가 무색하게, 몇 개 뻗지도 않은 짧은 가지마다 새순이 꼭 연녹색 가루를 뿌려 놓은 마냥 예쁘게 내려앉아 있더라.
거기서 뭐 대단히 감동적인 생명력이나 삶의 아름다움을 발견했다는 말은 아니고...
'나무는 고통을 정서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저 좁은 땅 위에서 하루 종일 매연이나 뒤집어 쓰면서 자연스럽지도 않은 모양으로 각목에 칭칭 묶여서 고통스러울지언정 나무는 불행에 빠져 자기 신세를 가여워하는 대신, 그 고통의 신호들을 그저 자기 생존에 위협 또는 불편이 되는 경보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대응을 하거나 순응을 하면서 살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로 그건 내가 닿고 싶은 가장 강력한 목표 중 하나가 되었다. 고통을 정서가 아닌 신호로써 받아들이기.
피부가 찢어졌을 때 아픈 건 찢어진 내 피부를 불쌍해하라고 아픈 게 아니라, 생명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자극이 감지됐으니 대처하라는 몸의 신호일 테니까, 신체적이거나 정신적인 모든 고통에 눈물로 대응하는 내 어리석음을 멈출 수 있다면.
물론 잘 안 된다. 그냥 계속해서 강렬한 꿈이자 이상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래도 자주 떠올리며 다시 한 번씩 마음에 새기려고 애쓴다. 나무는 고통을 정서가 아닌 신호로써 받아들인다.
행복하다고 우월하거나 불행하다고 열등하다는 생각 자체도 없어지고 살아가면서 받는 좋거나 나쁜 자극들이 전부 그저 내 생존에 이러저러한 영향을 끼치는 신호로서만 기능한다면,
나는 긍정적이지 못한 열등생의 딱지를 달고 있을 필요도 없어지지 않을까.
행복은 선물이지 디폴트값이 아니고
고통은 신호이지 실패의 증거가 아니게 된다.
너무 힘들어서, 긍정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응원조차 나에게 와 닿지 않고 그저 공허한 클리셰로만 울릴 때, 삶은 축복이며 인간은 긍정의 힘으로 힘껏 행복을 그러쥐어야 한다는 말이 오히려 나를 비난하는 칼이 되어 찔러올 때, 나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 고통스러워하는 게 이상한 게 아니고 사람이 불행한 게 이상한 게 아니고 마냥 생명력에 가득차 행복을 추구하지만은 않는 게 이상한 게 아니라고 인정해 주었으면 했다.
그래서 어느 날 다시 날이 좋아 내 가지들이 덩굴처럼 기지개를 켜면서 새 이파리들이 날개처럼 돋아날 때, 그냥 '아, 이제 날이 풀렸구나' 생각하며 조용히 기분좋을 수 있다면 참 아름답겠다고 생각했다.
최영경 기자 ykcho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