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가 허회태(58)는 ‘이모그래피’((Emography)의 창시자다. 이모션(감정)과 캘리그래피(글씨)의 합성어인 이모그래피는 한자를 몰라도 뜻을 알 수 있는 일종의 ‘서예그림’이다. 일필휘지의 힘찬 붓끝에서 용이나 사람의 형상이 드러나는 작업을 한다. 전남 순천의 큰아버지(강헌 허영재)에게 글씨를 배운 그는 중학생 때 휘호대회 최고상을 받았고, 고교 때 첫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국내에서 활동하던 그가 이모그래피로 해외에 눈을 돌린 건 10년 전이다. 2006년 독일월드컵에 맞춰 주독 한국문화원에서 개인전을 가진 후 2009년 미국 제임스 메디슨 대학교를 시작으로 이스턴 메노나이트 대학교, 주미 한국대사관, 조지 메이슨 대학교, 뉴욕 한국문화원에서 미국 순회 전시를 열었다. 지난해에는 스웨덴 국립박물관에서 초대전을 개최했다.
스웨덴국립박물관장은 당시 평론에서 “허회태 작가는 예술적 언어를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의 감정으로 소통하기 위해 서로 다른 나라와 문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감정의 작가다. 언어가 어떻게 문화를 창조할 수 있는지 전통의 서예를 기반으로 한 기법과 매체를 이용하여 역동적인 한국 문화를 보여주는 과감한 예술적 시도를 하였다”고 평가했다.
그런 점에서 전시회가 보다 많은 서구 관람객들의 많은 관심을 끌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감정의 표현에 있어 한국적인 층을 제어하는 훌륭한 표현방법을 제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현장 퍼포먼스를 하는 것도 작품전시의 중요한 부분이었다고 칭찬했다. 작가는 작품제작 과정을 실제로 보여 주고 관람객들은 작품을 더욱 깊게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됐다.
최근 몇 년간 서예의 기운생동(氣運生動)을 담은 이모그래피를 세계 곳곳에 알리고 돌아온 그가 27일까지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회고전을 연다. 이모그래피 창시 10주년 기념전이자 잇단 해외 전시의 성과에 대한 귀국보고전이다. 서예 16점, 이모그래피 40점과 함께 이모션(감정)과 스컬프처(조각)가 결합된 ‘이모스컬프처’ 45점을 선보인다.
21일 전시장에서 만난 그는 “서예가 단지 글씨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우주적 에너지와 생명을 불어넣는 복합예술이라는 점을 표현하고 싶다”고 말했다. 작품은 세필로 화선지에 글씨를 쓴 뒤 이를 직경 1㎝짜리 공 모양의 스티로폼 조각으로 일일이 감싼 후 캔버스에 붙였다. 글씨가 작은 조각이 되고, 작은 조각이 모여 큰 조각이 된다. 천지만물이 모여 우주를 구성하는 것과 같다.
서예의 정신은 살리되 동서양 미술 재료와 기법을 혼합한 새로운 실험이다. 그는 “세계 미술계에서 감성적으로 통할 수 있도록 10년 동안 연구한 결과물”이라며 “신작에는 ‘비상비비상(非想非非想)’이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끊임없이 변하면서 순환하는 상상의 원리를 담았다”고 설명했다. 전통 서예와 다소 동떨어진 게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 그는 “서예의 현대화”라는 말로 답했다.
김복영 미술평론가는 “허회태의 근작들은 ‘종래의 비명 같은 붓질로 소리의 아우성을 색으로 보여주려던 데서 벗어나고자 한다. 부조의 작은 조각들은 빌려 사라지고 태어나는 환의 만다라를 설(說)함으로써 그렇게 하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인간 윤회의 굴레를 재해석할 뿐 아니라 인간사가 벌이는 에로티시즘의 반복을 그 자신의 방법으로 해석한다”고 말했다.
이는 그가 이모그래피를 처음 시작했던 2000년대 초기로 돌아가 생각하면 커다란 변모가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애초에는 그가 우주의 태현(太玄)을 그리기 위해 신정의취(新情意趣)를 목표로 일획(一劃)에 집념을 보였으나 오늘에 이르러서는 ’위대한 탄생‘을 실현하기 위해 만다라를 구현하려는 의지를 지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근작들은 더 이상 우리의 선대가 일구었던 갑골문이나 선사 암각화와 같은 천지인 삼재구조를 형상화하려는 데 있지 않다. 이 보다는 근원적 심층의 세계를 응시하면서, 단순하지만 원초적인 이슈를 빌려 생명과 우주의 탄생, 나아가서는 소멸에 이르는 연기(緣起)의 전 과정을 형상화하고자 한다. 이는 이모그래피의 새로운 입안(立案)이 아닐 수 없다고 의미를 부여했다(02-588-3324).
이광형 문화전문기자 ghlee@kmib.co.kr
이모그래피 창시한 허회태 서예의 현대화 세계에 알리고 예술의전당서 귀국보고전 3월27일까지
입력 2015-03-22 19: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