짠한 웃음과 눈물 선사하는 연극 ‘경숙이, 경숙 아버지’ 배우들의 열연에 갈채가 쏟아지다

입력 2015-03-17 22:02
“경숙 아부지. 오데 그리 갑니까.” “아부지, 우리도 델고 가면 안 됩니꺼.” 아배는 또 다시 집을 나서 길을 떠난다. 장구 하나 매고 훌훌 봄바람마냥 가족을 두고 떠나간다. 한숨짓는 어매도, 철부지 딸도 아배의 역마살을 막을 재간이 없다. “너그들은 모른다. 집안은 여자들이 지키고 남자는 모름지기 세상일을 해야 하는 기라.”

5년 만에 돌아온 연극 ‘경숙이, 경숙 아버지’에 갈채가 쏟아지고 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가족을 버리고 혼자 피란을 떠나는 경숙 아버지와 남겨진 경숙이 모녀의 삶을 그린 무대다. 경숙이 아버지는 보통 아버지와는 다르다. 가장으로서 가족에게 헌신하는 책임감은 찾아보기 어렵다. 전쟁이 일어나자 전 재산인 집을 지키라며 아내와 딸을 두고 혼자 피란을 떠난다.

자신밖에 모르는 무심한 아버지인가 세상 물정 모르는 철없는 아버지인가. 하지만 밉지는 않다. 가슴 한 켠이 짠하다. 경숙 아버지에게는 우리 근현대사의 아픔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파란만장한 세월을 거쳐온 ‘웬수 같은 아버지’이지만 그래도 ‘그리운 아버지’라고나 할까. ‘경숙 아배’는 낡은 군화를 신고 장구를 둘러맨 채 전국을 싸돌아다니는 풍각쟁이다.

성질도 더럽고 폭력적이고 경제적으로도 무능한 경상도 남자이지만 ‘경숙 어매’는 그런 남편을 무서워하면서도 안쓰러워한다. 남편에게 늘 구박을 받으면서도 애틋한 사랑을 갈구한다. 어매는 집 나간 아배의 지엄한 명령대로 집 밖에는 ‘절대로 한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꼼짝 않고 기다린다. 그러던 어느 날 아배가 돌아오지만 한 남자를 데려왔다.

아배의 하는 말이 가관이다. “형님, 우리 식구들 잘 돌봐 주이소.” 그리고는 또 다시 훌쩍 떠나고 만다. “경숙이 아부지. 또 어데 갑니꺼. 우리는 또 우짜라고 그랍니꺼.” “남자가 하는 일을 너그들이 뭐 안다고 그라노. 팍 마~시끄럽다. 이 형님이 잘 돌봐 줄끼니깐 걱정 마라.” 그리고는 사단이 생긴다. 외로움에 어매가 외간 남자와 하룻밤 인연으로 애를 뱄다.

2006년 초연 당시 동아연극상 4개 부문(작품상, 희곡상, 연기상, 신인연기상), 한국연극평론가협회선정 올해의 연극, 올해의 예술상 등을 휩쓴 저력이 앙코르 공연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한마디로 재미있다. 눈물샘이 많은 관객은 시종 훌쩍거리기도 한다. 관객으로 하여금 감동을 이끌어내는 이 연극의 힘은 극단 골목길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력이다.

‘경숙 어매’ 역을 맡은 고수희는 외간 남자의 애를 배고 헛구역질을 하는 장면에서 땀으로 범벅된 열연으로 실제보다 더 리얼한 연기를 선보인다. 경숙이 역의 주인영은 속도감 있는 드라마 속에서도 작은 숨소리 하나 놓치지 않는 섬세한 연기를 뽐낸다. ‘경숙 아배’ 역의 김영필은 세상만사 걱정일랑 던져두고 팔도를 유랑하는 한량의 캐릭터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아배의 내연녀 ‘자야’ 역의 황영희는 아배를 살살 녹이는 아양을 떨다가도 청요릿집 주방장에게 착 달라붙는 맛깔나는 연기를 펼쳐 보인다. ‘꺽꺽이 아재’ 김상규의 능청스러운 헛기침도 킥킥 웃음을 준다. 연기란 무엇인지 배우들은 공연 내내 몸짓과 대사와 표정으로 말한다. 배우들의 척척 들어맞는 호흡, 신명나는 에너지가 관객을 사로잡는다.

이 극단의 작가이자 연출가인 박근형(배우 박근형과 동명이인)의 배우 중심 연출력도 빼놓을 수 없다. 관객들은 배우들의 짠한 연기에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60년 전 아버지들의 떠돌이 의식, 이로 인한 가장의 부재, 황폐한 시대의 일그러진 가족의 초상. 우리의 근대사는 이토록 가슴 아리고 절절하고 슬펐던 모양이다.

어느새 어른이 돼 아이를 낳게 된 경숙이가 탯줄이 아기 목에 걸려 위험한 상황에서 숨넘어가는 소리로 외친다. “아부지! 아부지! 경숙이 죽어예! 아부지!” 아무리 못났더라도 아버지는 아버지다. 90분의 공연이 끝나고 배우들이 관객에게 인사하는 커튼콜의 순간, 뜨거운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4월 26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 수현재씨어터. 2만5000~4만원(02-766-6506).

이광형 문화전문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