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출입증 만들어준다더니… 구직난 청년층, 사업부진 중장년층이 대포통장 모집사기에 취약

입력 2015-03-03 12:59
경찰이 압수한 대포통장. 국민일보DB

A씨는 지난해 9월 한 아르바이트생 채용에 합격했다. 아르바이트를 중개하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구인 광고를 보고 지원한 회사였다. 합격 사실을 알려온 채용 담당자는 “체크카드 겸용으로 사용하는 회사 출입증을 만들어야 한다. 퀵서비스로 체크카드를 보내주고 비밀번호도 알려 달라”고 했다. 그는 “정 의심스러우면 통장 잔고를 비우고 달라”고 덧붙였다. A씨는 그렇게 했다. 통장에 돈이 없으면 체크카드만으로 무슨 나쁜 짓을 할 수 있겠느냐는 생각이었다.

순순히 내준 체크카드는 며칠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채용 담당자와는 연락이 두절됐다. 통장을 확인해보니 큰돈이 들어왔다 곧바로 빠져나간 내역이 있었다. 뭔가 수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즉시 은행에 통장 사용정지 신청을 하고 도난신고를 했다. 그러나 은행은 A씨를 피해자로만 보지 않았다. 그는 남에게 계좌를 빌려준 대포통장 명의자로 등록돼 인터넷뱅킹 사용이 차단됐다.

국민권익위원회는 2012년 1월~지난해 12월 국민신문고에 접수된 대포통장 관련 민원 806건을 분석한 결과 A씨 사례처럼 아르바이트 공고를 빙자한 대포통장 모집 사례가 28.8%를 차지했다고 3일 밝혔다. 대포통장으로 쓰일 줄을 알고도 내주는 통장 임매·매입(41.4%) 사례를 빼면 가장 많다.

거짓 아르바이트 공고를 이용한 대포통장 모집에는 ‘알바몬’ ‘알바천국’ 같은 아르바이트 중개 사이트가 주로 이용되고 있다. 피해 사례 대부분(86.4%)이 이런 사이트에 올라온 구인 공고에 유인당한 것이었다. 구인·구직 정보지를 이용한 경우는 9.5%였다.

아르바이트 공고에 속아 대포통장 명의자가 된 사람은 20대가 48.5%로 거의 절반이었다. 비싼 대학 등록금과 높은 생활물가, 구직난 등에 겹겹이 시달리는 청년들이 이런 사정을 악용하는 대포통장 모집책들에게 농락당해 이중피해를 겪는 사례가 많다는 얘기다. 대포통장 명의자는 금융거래 제한은 물론 형사처벌까지 받을 수 있다. 대포통장은 대개 보이스피싱(전화금융사기), 인터넷 물품거래 사기 같은 범죄에 쓰인다.

거짓 구인 광고에 낚인 사람 중에는 대포통장으로 쓰일 것을 예상하고도 계좌를 내주는 경우도 있다. 2012년 7월 영문도 모르는 1억원가량의 세금 체납으로 재산을 압류당할 처지에 놓였던 B씨가 그랬다. 그는 2007년 신문 광고를 보고 직원을 뽑는다는 무역회사에 연락했다. 채용 담당자는 “회사 사정이 너무 어려워서 그러는데 세금을 피하는 데 쓰려고 하니 통장을 몇 달만 빌려달라”고 했다. 이상하긴 했지만 B씨도 나름대로 절박했다. 그는 10만원을 받고 통장을 만들어 보냈다. 직접 대포통장을 만들어 준 것이었다.

B씨 손을 떠난 통장이 수년간 전혀 다른 용도로 쓰인 사실을 확인한 건 세금 체납 통보를 받은 뒤였다. 통장에는 인터넷 게임아이템 거래사이트에서 10억원어치를 사고판 내역 등이 남아 있었다. 체납된 세금은 이 통장을 거쳐간 돈에 부과된 것이었다.

지난해 5월 인터넷뱅킹이 제한돼 금융거래에 어려움을 겪은 뇌병변 지체장애2급 C씨도 아르바이트를 구하다 대포통장 명의자가 된 경우였다. 그는 국민신문고에 올린 글에서 “반신불구로 생활이 너무 어려웠던 탓에 통장을 빌려주면 수수료를 준다는 말에 넘어갔다. 정부 보조금을 받아 사는 처지라 여력은 없지만 벌금이 나오면 조금씩 갚아 나가고 명의는 두 번 다시 빌려주지 않겠다”며 선처를 구했다.

강창욱 기자 kc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