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 갈등, 양극화서 갑을로 이동… 불신·고용불안·기술변화가 갈등 증폭시켜

입력 2015-01-26 20:21
2013년 4월 ‘라면 상무’ 사건, 같은 해 5월 남양유업 직원의 욕설·폭언은 ‘갑을 논쟁’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 회항’ 사건에 이르러 ‘갑질’은 우리 사회 고질병으로 등극했다. 최근엔 모든 사회 갈등이 갑과 을의 문제로 치환되고 있다. 김문조(65)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국사회의 갈등 요인이 양극화에서 갑을 문제로 이동했다”고 분석한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 구성원들은 갑질이 얼마나 심각하다고 느끼고 있을까. 한국언론진흥재단은 지난 14~16일 20~60세 성인 1000명을 상대로 한 온라인 설문조사에 응답자의 95%가 ‘다른 나라보다 더 심각하다’고 답했다고 26일 밝혔다. 갑질이 모든 계층에 만연해 있다는 응답은 77%나 됐다.

특히 응답자의 85%는 스스로를 ‘을’이라고 했다. 소득수준이 낮을수록 을이라고 느끼는 강도가 셌다. 월 가구소득 300만원 이하는 93%, 300~500만원은 88%가 스스로를 을로 규정했다.

갑질이 가장 심한 집단으로는 정치인·고위공직자·재벌이 꼽혔다. 권력과 돈을 쥔 특권층이 갑질의 최전선에 있는 셈이다. 다만 일상에서 흔히 당하는 갑질의 제공자는 고용주(67%), 직장 상사(67%), 거래처·상급기관(57%), 고객(51%) 순이었다.

갑질이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일본은 ‘파워하라’가 기승이다. ‘파워하라’는 힘을 뜻하는 영어 단어 ‘power’와 희롱을 의미하는 ‘harrassment’를 합친 조어로 상사가 지위를 이용해 부하직원을 괴롭히고 모욕하는 것을 지칭한다. 2010년 일본의 노동심판 안건 중 직장 괴롭힘 문제는 24.3%나 차지했다. 일본판 ‘고객 갑질’을 의미하는 ‘도게자’(무릎 꿇고 머리를 바닥에 대고 조아리는 행위)도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미국에선 ‘랭키즘’(rankism·신분주의)이 골칫거리다. 로버트 풀러 전 오버린 대학 총장은 가정·직장은 물론 인종과 성 등에서 광범위하게 랭키즘에 따른 ‘힘의 남용’이 발생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처럼 갑질은 세계 곳곳에 퍼져 있는 현상인데도 유독 이 시점에 한국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갈등 요인이 된 까닭은 뭘까. 불신이 분노를 낳고, 일자리 불안과 기술 변화가 갈등을 증폭시키면서 갑질이란 단어에 증오가 응축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한국사회학회장을 지낸 김 교수는 “한동안 우리 사회의 갈등 요소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인 것은 양극화였는데 요즘은 갑을 논쟁”이라며 “최근 과도하게 나타나는 이런 양상에 한국사회의 특수성이 잘 드러나 있다”고 말했다. 이 특수성을 그는 ‘특권층에 대한 증오’라고 분석했다. 김 교수는 ‘땅콩 회항’을 예로 들며 “잘잘못을 법리적으로 가리기보다 재벌 딸이 망신당하고 망가지는 모습을 통해 그동안 특권층에게 받은 굴욕을 해소해보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증오사회를 해소하려면 갈등을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관건이다. 김 교수는 ‘존중’과 ‘배려’를 해법으로 제시한다. 그는 “우리 사회는 존중과 배려에 목말라 있다. 빈부나 권력 차이가 갈등으로 촉발되지 않으려면 당당한 가난뱅이, 소신 있는 하급자의 활약이 보장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찬희 양민철 기자 c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