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아이들이 본 한국사회] “부자 아빠 둔 자녀가 특목고에 많은 게 우연일까요?”

입력 2015-01-23 19:31

“우리나라 직업 중 가장 일반적인 건 ‘회사원’입니다. 그런데 아빠 직업이 회사원인 게 여기서는 너무 드문 일이 됐습니다. 이게 우연일까요?”

지난 18일 오후 서울 광화문 드림센터에서 열린 ‘제3회 대한민국 청소년 연설대전’ 예선 현장. 살구색 교복을 차려입은 서울국제고 유세아(17·사진)양이 수줍게 연단에 올라 첫 마디를 던지자 장내가 일순간 조용해졌다. 팔짱을 끼고 있던 방청객 몇 명은 허리를 바짝 세우고 연단을 응시했다. 유양은 특목고에 진학한 뒤 느꼈던 소득 격차 문제를 담담히 풀어나갔다.

이날 예선에는 머리카락을 질끈 묶고 뿔테안경을 쓴 여고생, 이제 막 여드름이 돋아난 남학생, 앳된 얼굴이 가시지 않은 중학생 등 청소년 35명이 연단에 올랐다. ‘요즘 아이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심사위원으로 참여해 지켜본 아이들의 연설에는 한국사회의 단면이 그대로 투영돼 있었다.

◇아이들이 본 교육 현장=유양은 “우리 학교 친구들의 아빠는 대부분 교수 등 안정적인 지식인 계층의 직업을 갖고 있었다”면서 “문득 이렇게 돈 많은 사람들의 자녀가 특목고에 집중돼 있다는 게 우연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부모 소득이 교육 대물림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수치를 예로 들며 조목조목 설명하자 방청석에선 감탄이 터져 나왔다. 유양은 교육 현장의 격차가 좋은 대학, 좋은 직장, 많은 재산으로 이어지는 한국사회의 단조로운 성공 구조에 일침을 가하며 말을 맺었다.

단발머리를 찰랑거리며 무대에 선 서울 창덕여고 장주영(17)양이 자신을 “낙엽 보고 행복해하는 여고생”이라고 소개하자 장내에 웃음이 번졌다. 장양은 “백화점에서 수백만원을 일시불로 결제하는 사람을 보면 ‘무슨 직업을 가졌기에 저렇게 돈이 많지?’라고 생각할 뿐 ‘무슨 꿈을 이룬 거지?’라는 생각은 누구도 하지 않는 듯하다”고 입을 열었다. 그는 “미래 계획을 세울 때 공부와 좋은 학교, 좋은 직장을 빼놓고는 짜여진 길이 없더라”면서 “60대가 됐을 때 후회하지 말고 지금 진짜 꿈을 고민하라”며 어른스러운 충고를 던졌다.

◇사회 부조리 향한 일침=권력 남용의 위험을 일찍 깨달았다는 학생도 있었다. 경기도 가좌고 정민구(18)군은 중학생 시절 교내 선도부장으로 활동하며 힘을 마음대로 휘둘렀던 경험을 꺼냈다.

정군은 “친한 친구들은 슬리퍼를 신고 등교해도 봐주고, 안 친한 친구들에게는 넥타이 안 맸다고 벌점을 마구 주곤 했었다”면서 “생각이 다 자라지 못했던 열여섯 나이에 권력이란 무기를 조금 빗나간 방법으로 썼다”고 고백했다. 이어 ‘땅콩 회항’ 사건을 예로 들며 “공인된 권리와 힘을 지니려면 수준 높은 도덕성과 책임감, 중립성 그리고 상대방 입장을 헤아릴 줄 아는 공감 능력이 필수”라고 조목조목 짚었고, 방청객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그마한 체구의 경기도 현화중 안솔(15)양은 일부 기업이 채용 조건으로 키와 외모를 본다는 이야기에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안양은 “외모 때문에 꿈꾸는 것도 자유로울 수 없는 세상이 됐다”고 규탄했다. 이어 “당신이 대기업 면접자라면 배우 김수현과 MC 강호동 중 누굴 선택하겠는가. 어른들은 공부만 하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고 했는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며 어른들의 말과 현실 사회의 괴리에서 오는 ‘배신감’을 토로했다.

이밖에도 아이들은 ‘갑질 문화’ 규탄부터 아무리 공부해도 1등 친구를 이길 수 없었던 자신의 콤플렉스, 말하기 쉽지 않은 가족사 등을 어렵사리 끄집어내며 한국사회의 구석구석을 조명했다. 수상을 위한 경쟁보다 자신을 성찰하는 모습이 엿보였다. 어른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 아이들의 연설문은 순수했고 그만큼 진실했다. 대학 입학을 위한 ‘스펙’을 쌓으러 이런 대회에 나왔으리란 편견은 어느새 무너져 있었다.

이 행사는 시민단체 다준다정치연구소와 청소년 교육기업 사람에게배우는학교가 공동 개최했다. 주입식 교육을 주로 받는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논리적으로 말하기’에 약하다는 점에 착안해 기획됐다. 지난해 1월 시작돼 이번이 3회째다. 본선은 25일 오후 2시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다.

정부경 기자 vick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