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화가 박병춘(덕성여대 교수)의 경기도 의정부 작업실 주변에는 밤나무와 물푸레나무가 있다. 작업을 하는 틈틈이 나무들을 바라보고 감성을 나누고 교감한다. 지난 가을부터 겨울까지 나무를 대상으로 그림을 그렸다. 작가에게 부부처럼 보였다는 두 나무가 서 있는 풍경을 중심으로 시리즈를 포함해 다양하게 작업했다.
경기도 파주 헤이리에 있는 갤러리 이레에서 ‘같은 나무 다른 생각’이라는 타이틀로 1월 27일까지 개인전을 연다. 나무 연작 9점과 신작 5점 등을 전시한다. ‘구름이 있는 날 풍경’ ‘가을 어느 날의 풍경’ ‘노을이 지는 날 겨울 풍경’ ‘눈 내리는 날 풍경’ ‘서리가 내린 날 풍경’ ‘안개 낀 날 풍경’ ‘파란 하늘이 있는 가을 풍경’ 등 한지에 먹과 아크릴 또는 캔버스에 아크릴로 그렸다.
작가는 나무를 그리는 과정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을 느끼고, 시시각각 변화하는 자연의 모습을 섬세하게 표현했다. 같은 대상을 두고 그려낸 연작들에서 작가의 세심한 관찰력이 드러난다. 마치 나무와 대화를 나누며 그린 듯한 느낌을 준다. 관객들이 작품을 보면서 시간의 변화와 작가의 심경의 변화 등을 느낄 수 있게 했다.
작가는 “작업실 근처를 산책하다 보면 한 200평 남짓 되는 밭가에 비스듬히 서있는 두 그루의 나무, 밤나무와 물푸레나무를 만날 수 있다. 지난겨울 의정부 자일동으로 작업실을 이사한 후 산책을 할 때 마다 길가에 우두커니 서서 그 나무들을 바라보곤 했다. 왠지 그 나무들을 보고 있으면 이것저것 많은 단상들이 머리를 스쳐갔다”고 설명했다.
그것은 여행에 대한 생각, 자신의 그림에 대한 생각, 소중한 것들에 대한 생각, 아버지에 대한 생각, 미래에 대한 생각들이었다. 나무를 보고 있는 동안 작가의 머릿속은 먼 허공 저 멀리까지 날아올랐다 돌아오곤 했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두 나무가 왼쪽으로 비스듬히 서있는 모습이 마치 오래된 부부 같아 보이기도 했다.
쑥스러워 피하는 남편과 애교를 피우는 예쁜 아내의 모습처럼 그 나무를 보면 기분이 좋아졌다고 한다. 작가는 “나무가 보이는 길가에 서서 저걸 언제 그려봐야 할 텐데”라고 마음만 먹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몇 번의 수술과 후유증으로 중환자실을 들락거리는 아버지와 병간호를 위해 고생하시는 어머니와 아내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 붓과 화판을 챙겨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름이 막 지나갈 무렵 작가는 용기를 냈다. 화판과 이젤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나무의 생김새, 가지의 구조, 잎사귀의 흔들림을 쫓아 정신없이 그림을 그리다 보니 걱정도 아픔도 잊을 수 있었다고 한다. 10월의 끝자락 아버지가 생과 사의 갈림길을 왔다 갔다 하는 동안 나무와 대화하며 힘든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중에 시월의 마지막 날 아버지는 떨어지는 낙엽을 따라 하늘나라로 가셨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돌아오니 이미 나무는 잎을 다 떨구어 내고 앙상한 모습만 남아있었다. 겨울은 금세 눈으로 나무를 뒤덮었고 작가는 눈 속에서 서럽게 떨고 있는 앙상한 나무를 그리며 떠나가신 아버지의 슬픔을 이겨내고 있었다.
같은 나무를 그리는 과정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을 느끼고 천지를 바꿀 수 있는 자연의 위대한 힘을 세밀히 관찰할 수 있어서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고 작가는 고백한다. 아직 또 다른 봄이 오지는 않았다. 새봄이 오면 지난봄에 그리지 못한 파릇파릇한 신록의 나무를 그리면서 하늘나라에 계신 아버지의 소식을 그 나무들에게 전해들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작가는 “힘들 때 함께했던 두 그루의 나무 밤나무와 물푸레나무는 내 마음을 알고 있으니 한동안 내 상처를 위로해 줄 것”이라고 말했다. 2012년 세계여행 이후 줄곧 고민해오고 있는 작가 자신의 작업 방향에 대한 고심을 들여다볼 수 있는 전시가 아닐까 싶다. 한지에 먼 산은 먹으로 가까운 풍경은 아크릴로 붓질한 작품도 새롭다(031-941-4115).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
한국화가 박병춘 헤이리 이레 갤러리 나무들과의 대화 '같은 나무 다른 생각' 개인전 1월27일까지
입력 2015-01-14 17: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