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덕영 장로 칼럼-종교인과 신앙인 (105)] 고독사와 교회의 배려

입력 2015-01-14 10:57

몇 년 전 뉴스를 통해 80세 노모가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이유는 고독사였다고 한다. 또한 얼마 전 한 유명연예인도 자실을 했다. 그 역시 이유는 고독사다.

주변에서도 어떤 분이 교회에서 분주하게 활동하던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외롭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을 한 것을 보며 망연자실하던 것이 기억이 난다.

어제 저녁에는 한 교회 권사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이제 연세가 많으시니 성가대에서 물러나시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울면서 통화를 하셨다. 권사님은 “내 남편이 늙고 힘은 없어도 명문대에서 정년을 마친 학자”라며, “돈이 없다는 것과 남편이 교회에 같이 나가지 않는다는 것을 이유로 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닌가”하고 하소연했다.

“그동안 남편을 적극적으로 전도하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남편은 일생을 학문과 정직으로 살아왔다”고 한다. 그 권사님은 한 교회의 유년부와 대학부를 거치며 평생 동안 교회에 헌신하셨다. 그리고 이제는 힘도 없고 돈도 없다. 의지할 곳이라고는 교회뿐이다.

이제 교회에서 하나님만 바라보며 봉사하고 싶다고 한다. 성가대에서만 50년이 넘도록 봉사하셨고, 모든 교회 봉사에 빠지지 않고 참여해 손가락이 휘도록 일했다. 말을 잇던 권사님은 또 한 번 엉엉 우셨다. 나는 전화를 받으면서 나도 눈물이 흐르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 눈물에는 나 자신에 대한 반성과 권사님에 대한 미안함, 더불어 이토록 노인에 대한 배려가 없는 주변 사람들에 대한 원망도 들어있었다.

주일예배 후, 쉼터에서 커피를 한 잔 하고 있었는데 또 다른 은퇴 권사님이 잠깐 이야기를 나누자고 청해왔다. 그 권사님은 노인대학을 올해부터 없앤다는 발표가 사실이냐고 내게 물으셨다. 본인들은 수요일 하루 나와서 뜨개질도 배우고 건강 강의도 듣고 서로 이야기도 하면서 고독한 마음을 달래고 있었는데 왜 그것을 폐쇄하느냐고 질문한다. “돈 때문에 그러는 것이라면 우리가 만 원 씩 회비를 올릴 테니 없애지 말아달라”고 내게 통사정한다.

교회는 ‘모든 경비를 절감하고 그 돈으로 아프리카와 인도, 중국 등에 선교를 하겠다’는 목사님의 의지가 뚜렷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실정이라는 것을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대구에 내가 아는 장애인 한 분이 계신다. 어렸을 때부터 손을 못 쓰는 분이다. 택시를 운전하는 분과 결혼했고, 친정에서 도와주는 생활비를 받으며 살았다. 아들 하나 낳고 남편은 2년 전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혼자가 된 지 1년 만에 친정아버지도 돌아가시고 몇 달 후 어머니마저 돌아가셔 너무나 고독하게 되었다.

그런데 천주교 교구에서 그 분께 도움을 주었다. 교인들이 쌀도 주고 김치도 주며 틈나는 대로 교구 전체가 그를 돌봐주고 그의 벗이 되어주고 있다. 그리고 경북대학교에 재학 중인 아들에게는 가정교사 자리를 만들어주어 그것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했다. 부모님이 보고 싶을 때에는 성당에 가서 기도하고 찬송하면 슬픔이 사라져 고독감이 없다고 한다.

가톨릭의 공동체는 정말 이웃의 아픔을 잘 보듬어 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교회도 배울 점이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성경의 ‘네 형제 부모를 돌보지 아니하고 남을 돌본다고 하는 것은 악한 자보다 더 악한 자’라는 말씀이 생각난다. 어찌 형제자매와 평생 교회에 몸 바친 분들을 돌보지 않고 선교를 할 수 있을까. 왠지 어색한 느낌이 든다.

선교도 중요하고 젊은이 전도도 중요하고 북한 돕기도 중요하다. 그보다 ‘네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성경 말씀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늙은 교회 형제를 돌보라’는 말씀도 생각난다.

고독한 노년에 대한 교회의 배려를 심각하게 생각할 때라는 생각이 들어 우울한 하루를 보냈다.

한국유나이트문화재단 이사장, 갈렙바이블아카데미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