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역사학회, 일제 무단통치때 한국교회의 항일 인식 고양

입력 2015-01-13 14:48
한국기독교역사학회는 10일 서울 마포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에서 제331회 학술대회를 열었다.

‘일제 하 한국 기독교의 내지(內地) 개념 수용 과정과 일본인식-무단통치기(1910~1919)를 중심으로’를 제목으로 발표한 연세대 홍이표 박사는 “일제의 무단통치 시기는 조선이 그 내지성을 상실하고 외지로 전락한 직후”라고 말했다. 홍 박사는 “무단통치 시기의 한국 기독교는 ‘항일적 일본인식’을 고양해 나간 시기라고 평가할 수 있다”며 “즉 ‘내지 상실’의 충격 속에서 ‘새로운 내지’로 강요된 일본을 낯설게 마주하며 거부하던 시기였다”고 말했다.

홍 박사는 “통감부 시기부터 일제의 ‘내지시찰단’은 일본을 문명과 근대에 도달하기 위한 첩경이라고 세뇌시키려 했지만 서구의 근대를 배경으로 한 선교사들과 밀착된 기독교인들을 설득시키기는 어려웠다”고 말했다. 이어 “조선총독부는 ‘일본조합교회’를 통해 통제가 어려운 한국기독교를 동화(내지화)하려 했지만 그것마저도 실패했고, 일본조합교회는 본국으로 철수하고 말았다”고 말했다.

홍 박사는 또 “을사늑약 체결 이후 일본의 실체를 파악한 상동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주도했고 이후 신민회 등으로 진화해 나갔다”며 “이동휘 손정도 여운형 등 기독교인 독립운동가들은 3·1운동 이후에도 ‘내지’라는 개념을 조선을 지칭할 때만 사용했다”고 말했다.

이어 “초기 한국 기독교에는 ‘일본을 알고 공부하자’는 우호적인 인식이 있었지만 한일 합병 이후부터는 급변해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정책을 위협했다”며 “때문에 당시 데라우치 총독은 105인 사건을 조작하는 등 기독교인들을 핍박했다”고 설명했다. 홍 박사는 “하지만 기독교는 ‘항일적 교회’로서의 면모를 잃지 않았고 오히려 강화해나갔다”며 “병합 이후 무단통치 시기의 한국 기독교는 ‘내지 회복의 열망’을 담은 ‘항일인식’에 가치를 부여하며 한국사 안에 자리매김했다”고 말했다.

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