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고 열풍에 휩싸인 대중문화… 신(新)문화가 되다

입력 2015-01-07 19:38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남자는 소년이었다. 전쟁 직후 먹고 살기가 힘들어 ‘헌혈’이라는 이름을 빌어 피를 팔았다. 고단한 일상을 달래준 곳은 서울 종로구 무교동 골목에 있던 음악 감상실 ‘쎄시봉’이었다. 기쁨도 있었다. 결혼했고 아이를 낳았다. 서울 개발이 시작되면서 강남땅을 둘러싼 소리 없는 땅 쟁탈전이 시작된 1970년대였다. 그의 아이들은 자라서 ‘X세대’라 불렸고 지누션, 김건모, SES 등에 열광했다.

2015년 1월, 남자는 70대 노인이 됐고 아이들은 사회를 이끌어 가는 30·40대가 됐다. 그리고 그들이 보고 경험한 것들은 ‘복고’라는 수식어를 달고 21세기 신(新)문화로 등장했다.

◇복고 열풍에 휩싸인 대중문화=영화계는 지난 해말 개봉한 ‘국제시장’ 흥행을 시작으로 과거 이야기를 쏟아낸다. ‘허삼관’, ‘강남1970’, ‘쎄시봉’이 개봉을 앞두고 있다. ‘국제시장’과 ‘허삼관’이 1940·50년대 생들이 가장으로서 가정을 지키기 위해 고생한 분투기라면, ‘쎄시봉’은 그들이 즐겼던 청년 문화, ‘강남1970’은 개발독재시대의 경제적 상황을 녹여내고 있다.

가요와 방송은 70년대에 태어나 ‘X세대’로 불렸던 이들이 향유한 90년대 문화에 주목하는 분위기다. MBC ‘무한도전’은 최근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토토가)’로 90년대 대중음악 풍경을 재현해 폭발적인 호응을 받았다. 당시 인기 가수들이 그때 복장 그대로 무대에 올랐고 방송 자막이나 무대 장치, 조명도 90년대 방식을 따랐다.

케이블채널 tvN은 드라마 ‘응답하라 1997’, ‘응답하라 1994’를 통해 90년대 젊은이들이 즐기던 가요와 TV 프로그램, 의상, 먹거리부터 시대적 상황까지 재현해내며 큰 인기를 끌었다.

50년대 생과 70년대 생의 문화는 2010년대 대중의 감수성과 통했다. 퀘퀘한 과거 이야기가 세련된 영상매체를 통해 새로 포장되면서 세련된 문화 컨텐츠가 됐다. 그들이 살아온 ‘꿈을 향해 달렸던 시대’라는 공통점이 전 세대의 공감을 낳았다. 자기가 겪은 고생을 자식들에게는 물려주고 싶지 않다는 ‘국제시장’ 아버지의 모습은 젊은 세대를 울렸고 ‘토토가’나 ‘응답하라’ 시리즈는 사회와 가정을 이끌어 가느라 피곤에 찌든 지금의 30·40대에게 꿈 많고 철없던 시절이 있었음을 일깨워줬다.

◇‘세대의 문화’가 아니라 ‘모두의 문화’=복고 열풍으로 세대간 경계도 사라지고 있다. 10·20대는 책이나 TV에서 보던 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 세대 이야기를 새로운 문화로 받아들이고 있다. 지난 3일 ‘토토가’가 방송된 직후 주요 음원 사이트에선 무대에 선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 지누션의 ‘말해줘’ 등이 1위를 비롯해 상위권을 휩쓸었다. 디지털 음원 시장의 주요 고객인 10·20대가 90년대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국내 최대 음원 사이트인 멜론 관계자는 7일 “특정 계층의 지지만으로는 100위 안에 들어올 수 없다”면서 “젊은 세대들이 좋아하는 ‘무한도전’이라는 플랫폼을 통해 젊은 세대가 90년대 노래에 자연스럽게 접근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50대 이상도 영화나 예능, 케이블 드라마 등을 젊은층과 함께 즐기고 있다. MBC에 따르면 ‘토토가’ 시청자는 40대 여성이 가장 많았고 그 뒤를 50대 여성, 40대 남성과 30대 여성이었다.

‘국제시장’의 예매율도 특정 연령대의 쏠림 현상은 없었다. CJ ONE카드 적립 기준 통계자료를 보면 지난 4일 현재 ‘국제시장’은 50대 이상의 예매율이 10.3%로 두 자릿수를 기록했고 20~40대 예매율도 30% 전후로 비슷했다. CGV 관계자는 “70대 부모가 자녀들과 영화를 보기 위해 티켓을 직접 구매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방학을 맞아 서울 여의도 CGV영화관을 찾은 고등학생 남지은(16·여)양은 “책에서나 보던 것들이 알고 보니 우리 할아버지가 경험했던 일이었다는 점에 놀랐다”면서 “지난 주말에는 아빠랑 같이 ‘무한도전’을 봤는데 옛 노래 같지 않고 듣기 좋았다”고 말했다.

서윤경 기자 y27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