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1,2차 정상회담의 막후접촉사...남북관계 통로

입력 2015-01-04 16:51

최근 정부가 남북 정상회담을 위해 막후접촉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지면서 이전 정부의 대북 물밑 협상 과정에도 이목이 쏠리고 있다.

1·2차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킨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수 십 차례의 막후접촉으로 북한 최고 지도부의 의중을 타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민하고 돌발 변수가 많은 남북관계의 특성상 공개적으로 정상간 만남을 거론하기에는 한계가 많다. 막후접촉 필요성이 제기되는 가장 큰 이유다.

김대중정부 당시 남북정상회담 개최 가능성이 제기된 것은 2000년 1월말이었다. 북한 지도부가 금강산 관광과 소떼 방북 등을 통해 긴밀한 관계를 맺은 현대그룹을 통해 우리 정부에 정상회담 추진의사를 전달해오면서였다. 이후 북한과의 막후접촉은 당시 문화부 장관이던 새정치민주연합 박지원 의원이 맡았다. 그해 3월 17일 박 의원은 중국 베이징에서 송호경 당시 북한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과 협상을 시작했다. 박 의원은 평양·상하이 등지에서 모두 5차례 비밀접촉을 했다고 한다.

실무접촉은 임동원 당시 국정원장과 임동옥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이 이어갔다. 5월 27일 개성에서 첫 만남을 가진 두 사람은 6월 15일 1차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역사적인 첫 남북 정상간 만남으로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그러나 비밀접촉의 후유증도 컸다. 정상회담 개최 조건으로 4억5000만 달러가 북한에 송금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기 때문이다.

2차 정상회담 역시 막후접촉으로 이뤄졌다. 2005년 6월 17일 ‘6·15민족통일대축전’참가를 위해 방북한 정동영 당시 통일부 장관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났다. 노무현정부는 정상회담을 원했지만, 대화채널이었던 북측 김용순 아태평화위원회 위원장과 송호경 부위원장이 사망한 뒤 대체할 만한 인물을 찾지 못해 애를 태웠다. 정 전 장관 방북시 북측 실무자였던 임동옥 제1부부장은 1차 남북정상회담실무교섭 창구였던 인물이다.

2006년 10월 노무현 대통령 측근 안희정 충남도지사가 중국 베이징에서 북측 인사와 비밀접촉을 시작했다. 그해 11월 김만복 당시 국정원장이 비밀협상 책임자로 나섰다. 2007년 7월 노무현정부는 북측에 김 전 원장과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간 고위급 접촉을 제의했다. 북한은 8월초 김 전 원장을 비공개 초청해 ‘김-김 라인’이 가동됐다. 그는 8월 2~5일 연달아 두 번 평양을 극비리에 방문해 2차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이명박정부때도 3차 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막후접촉이 있었다. 이 대통령 특사였던 임태희 전 노동부 장관은 2008년 10월 싱가포르에서 김양건 통일전선부장과 비밀리에 회동했다. 양측은 북핵문제를 논의하자는 데는 합의했지만 납북자 및 국군포로송환문제와 대북식량지원문제에 대해 이견을 보였다. 그해 11월 양측 실무진이 개성 자남산여관에서 2차례 비밀접촉을 가졌다. 이듬해인 5월 9일 김태효 당시 청와대 대외전략비서관이 베이징을 방문해 북측인사를 만났다. 하지만 양측의 협상은 결렬됐다.

우리측은 이 사실을 비밀에 붙였지만 북한은 6월 1일 국방위원회 대변인 명의로 충격적인 내용을 공개했다. 우리측이 “천안함 폭침사건과 연평도 포격도발사건에 대해 북한이 사과한다면 정상회담을 갖자”고 구체적인 시간표를 제시했고, 자신들이 이를 거부하자 돈 봉투를 쥐어주려 했다고 폭로한 것이다. 정상회담을 위해 구걸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정상회담을 위한 물밑접촉 사례는 국제사회에서도 적지가 않다. 미·중이 1972년 수교할 때도 이전부터 치밀한 막후교섭이 있었다. 1971년 파키스탄을 방문중이던 헨리 키신저 미 백악관 안보담당특보는 복통을 핑계로 휴식을 취해야 한다며 파키스탄 대통령의 전용기를 타고 베이징에 들어가 비밀접촉을 가졌다. 북한 전문가들은 “남북관계를 투명하게 가져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남북간에는 서로 속내가 다르고 공개할 수 없는 내용도 많다”며 “보이지 않게 만나 서로 허심탄회하게 얘기하는 것이 적절한 시점도 존재한다”고 조언하고 있다.

최현수 군사전문기자 hscho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