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공장 직원으로 근무하던 A씨(52·여)는 2011년 6월 공장 소장이던 서모(61)씨가 사는 집에 찾아갔다. 서씨와 함께 사는 직장 동료가 “밥상을 좀 구해 달라”고 부탁해서였다. 밥상을 들고 간 A씨에게 소장은 “잠깐 있다 가라”고 했다. 서씨는 맥주 한 캔을 건네더니 방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방에 따라 들어간 A씨는 분위기가 어색하다고 느껴 일어나려 했다. 그때 서씨가 A씨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손목을 당기며 그는 “자고 가요”라고 말했다.
검찰은 서씨를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추행’ 혐의로 기소했다. 1·2심 법원도 서씨의 행위를 성추행으로 인정해 유죄(벌금 300만원)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자고 가라’는 말을 성관계를 갖자는 의미로 파악했다. 그러면서 손목을 잡았기 때문에 업무상 부하직원인 피해자를 위력을 사용해 추행했다고 보기 충분하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 1부(주심 이인복 대법관)는 “서씨의 행위를 추행이라 볼 수는 없다”며 원심을 깨고 무죄 취지로 사건을 춘천지법에 돌려보냈다고 2일 밝혔다. 손목이란 신체 부위를 단순히 접촉한 것만으론 성적 수치심이나 혐오감이 생긴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손목을 잡은 건 돌아가겠다는 피해자를 다시 자리에 앉히기 위한 행동”이라며 “이후 피해자를 쓰다듬거나 안으려 하는 등 성적 의미가 있는 다른 행동까지 나아가지는 않았다”고 밝혔다. 비록 ‘자고 가라’는 성희롱적 발언을 했다 하더라도 손목을 잡은 구체적 행위 자체가 추행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대법원 관계자는 “손목을 잡은 강도에 따라 폭행죄로 처벌하거나 혹은 서씨의 성희롱적 발언에 대한 과태료 처분 등은 가능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피해자가 느끼는 성적 수치심과 혐오감은 성범죄 성립 여부를 따지는 기준이 된다. 그러나 피해자의 느낌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어떤 신체 부위에 어떤 행동을 가해야 추행이 되는지는 종종 논란이 되곤 했다.
지난해 대전고법(청주재판부)은 회식 자리에서 신입 여직원의 엉덩이를 때린 상사에게 벌금 600만원을 선고했다. 상사는 “성적 의도를 갖지 않은 단순 폭행”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원은 “성적 의도가 없었다 해도 여성의 엉덩이를 때리는 건 일반적이고 평균적인 사람에게 성적 수치심을 일으키는 행위”라고 판시했다. 반면 온천장에서 잠들어 있던 중년 여성의 코를 잡아 비튼 회사원에게 법원은 추행이 아닌 폭행죄를 적용했다. 재판부는 “코 부위를 사회통념상 성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신체 부위로 단정하기 어렵다”고 봤다.
서울중앙지법은 2013년 짧은 원피스를 입고 지하철에 앉아 있는 여성의 전신사진을 찍은 남성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여성의 노출이 과도한 정도는 아니었고, 공공장소에서 사람의 시야에 통상적으로 비춰지는 모습을 그대로 촬영한 것”이라며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타인의 신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성적 수치심에 대한 일률적 기준을 세우기는 어렵기 때문에 법원은 당시 상황, 피해자와 가해자의 특성, 행위의 정도 등을 종합해 판단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정현수 기자 jukebox@kmib.co.kr
“자고 가라”며 여직원 손목 잡은 상사… “추행 아니다”라는 대법원
입력 2015-01-02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