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씨는 2011년 1월 박모(38·여)씨와 결혼했다. 서울의 고급 호텔에서 성대하게 결혼식을 치렀다. 박씨는 재력가 집안의 딸이었다. 예식장은 하객들로 꽉 찼다. 고급 수입차를 타던 박씨는 A씨에게 스스럼없이 수입차를 선물했다. 신혼집도 알아서 장만하고 수백만원짜리 명품도 아낌없이 사줬다.
아내는 유명 대학병원의 촉망받는 의사이기도 했다. 박씨가 쓴 일기장에는 평범한 직장인인 A씨가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의학용어들이 빼곡했다. 아내는 자신의 논문이 해외 유명 학술지에도 등재돼 있다고 했다. 주변 사람들도 살뜰하게 챙겼다. 집안일 돕는 가정부의 자녀들에게 수백만원짜리 명품 점퍼와 티셔츠를 선물했다. 주위에 아픈 사람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병원에 전화해 진료예약을 잡아줬다. 누가 봐도 박씨는 완벽한 아내였다.
그랬던 아내 때문에 경찰서에 가게 된 A씨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결혼 후 2년여 만에 박씨와 A씨를 고소한 사람은 다름 아닌 A씨의 누나였다. 자초지종을 들은 A씨는 기가 막혔다. 박씨는 시누이에게 “곧 돌려주겠다”며 2700만원을 빌렸다고 한다. 그러고는 다시 “채권 투자를 해주겠다”며 2억원을 빌렸다. 돈을 빌려줄 당시 시누이는 ‘유능한 의사’인 박씨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게 박씨가 33차례 빌려간 돈은 모두 5억2000여만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박씨는 그즈음 갓 난 딸을 데리고 잠적해 버렸다. 자살을 암시하는 문자메시지를 마지막으로 박씨 휴대전화는 착신이 정지됐다. 박씨의 지인이라던 사람들과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 피해자는 시누이뿐만이 아니었다. 가정부와 경비원, 수입차 판매원까지 박씨에게 투자한 돈을 돌려달라며 A씨를 찾아왔다. 박씨는 그동안 사치스런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주변 사람들에게 투자 명목으로 돈을 빌려 ‘돌려막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씨는 재력가의 딸도, 의사도 아니었다. 아내가 다녔다는 병원 의사 명단에는 박씨 이름이 없었다. 심지어 의대를 다닌 적도 없었다. A씨가 직접 봤던 아내의 의사 가운과 수술복, 신분증은 모두 위조된 것이었다. 예식장과 돌잔치에 왔던 처가 가족과 하객들은 모두 아내가 고용한 대역이었다. A씨는 장인 명의로 돼 있던 신혼집을 처분하러 간 곳에서 처음으로 ‘진짜’ 장모를 만났다. A씨가 알고 있는 아내의 인생은 통째로 가짜였다. 일본 소설 ‘화차’와 이를 토대로 만든 한국 영화 ‘화차’의 현실 버전이라 할 만하다. 화차는 갑자기 사라진 약혼녀를 찾아 나선 남자가 모든 게 거짓이었던 그녀의 실체를 찾아가는 이야기다.
결국 박씨는 지난해 3월과 5월 잇달아 불구속 기소됐다. 당시 아이를 부양해야 하는 점이 참작돼 구속은 면했다. 그러나 박씨는 그 와중에도 “병원에 육아휴직을 내고 쉬고 있다”고 속이며 사기행각을 이어갔다. 결국 지난해 8월 구속됐다. 피해자는 8명, 총 피해액은 9억1320만원이다. 구치소에서 어린 딸과 함께 생활하며 재판을 받던 박씨는 검찰의 공소사실을 모두 인정했다.
박씨는 법원에 여섯 차례 반성문을 제출했지만 중형을 피할 수 없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13단독 박진수 판사는 박씨에게 징역 5년을 선고했다고 1일 밝혔다. 선고 당일 딸을 품에 안고 법정에 나온 박씨는 묵묵히 판사의 선고를 들었다. 박 판사는 “(사기극이) 중단됐어야 한다”며 “피해자들의 경제적 고통을 생각해보라”고 박씨를 꾸짖었다.
정현수 기자 jukebox@kmib.co.kr
아내 정체의 모든 것이 거짓말? ‘한국판 화차’ 30대에 징역 5년 중형
입력 2015-01-01 19: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