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항 논설위원의 ‘그 숲길 다시 가보니’] 개발과 보존의 갈등 너머 움트는 청정 제주의 미래

입력 2014-12-31 21:35 수정 2014-12-31 21:42

제주도는 내게 늘 애틋하게 그리운 존재이면서도, 복잡한 양면적 감정을 일으키는 무엇이다. 그 섬의 곳곳에는 늘 사연, 사람, 산과 동식물, 그리고 직업적 관심이 결부된다. 몸과 마음이 휴식을 원할 때도, 치열한 이야기와 논쟁이 필요할 때도 찾아가는 곳이다. 숱한 피침과 수탈에 맞서서 잠들지 않았던 저항의 섬이면서도 관광산업과 개발을 위해 기꺼이 육지와 외국의 자본에 몸을 내주는 섬이기도 하다. 그곳에선 개방과 배타의 기류가 공존한다.

◇ 한라산에 첫 눈이 내린 이후
제주도 날씨가 비교적 좋은 10월부터 11월 중순을 다른 일정으로 그냥 보내고 12월 첫 주에 방문했다. 기대를 저버리고 궂은 날씨가 기자 일행을 괴롭혔다. 도착한 2일 낮에는 제주시에 비와 우박이 번갈아 내렸고, 서귀포로 넘어가는 5·16도로에는 눈이 쌓여 엉금엉금 운전을 해야 했다. 여우(호랑이)가 하루에도 수십 번 시집가는 섬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한라산에 첫 눈이 내린 후로는 날씨 좋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이다. 한라산 등산도 일찌감치 포기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지난여름 제주도에는 과장을 조금 보태서 “내내 비만 내렸다”고 한다. 큰 비로 인한 피해도 컸다. 주민들로부터 “올해 같으면 제주도에서 못 살겠다”는 말이 나왔다. 조선 중종 때의 문신인 충암 김정(1486~1521)은 기묘사화로 제주도에 유배됐을 때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사람이 입고 먹는 것을 조절하기가 어려워서 병나기가 쉽다. (…) 갠 날이 적고, 눈 먼 바람과 괴이한 비가 때도 없이 일어난다.” 관광지로서 제주도의 결정적 약점은 특히 관광성수기에 날씨가 좋지 않다는 점이다. 하긴 등산하기에 너무 어렵지도, 만만하지도 않은 적합한 산과 청정바다, 화산섬으로서 다양한 자연유산, 아기자기한 볼거리와 걷기 좋은 숲길들까지 갖춘 제주도가 날씨마저 좋다면 하와이를 능가하는 휴양지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 난개발에 잠식당하는 유일무이의 생태공간
제주도에서 개발과 보존의 갈등은 주로 중산간지대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그 중에서도 북동부의 중산간지대가 가장 관심을 모으고 있다. 곶자왈과 화산지형이 발달한 조천읍, 구좌읍 일대는 농사를 짓기에 부적합한 땅이라서 과거엔 땅 값이 상대적으로 싼 편이었다. 물론 과거에도 농지나 목초지 개간을 위해 벌목을 했지만, 심각한 수준의 파괴는 역시 산업화 및 관광개발과 더불어 급속도로 촉진됐다. 풍광이 뛰어난 곶자왈을 포함한 중산간지대가 골프장, 도로, 관광지 등 대규모 개발이 진행되면서 1990년대 후반부터 10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훼손됐다.
곶자왈은 ‘곶’과 ‘자왈’의 합성어다. 곶은 나무와 덩굴이 얼클어져 자연림을 이룬 곳을 말하고, 자왈은 자갈이나 잡석이 많은 곳을 가리킨다. 지질학적으로는 화산이 분출할 때 점성이 높은 용암이 경사면을 흘러가면서 크고 작은 바위덩어리로 쪼개져 형성된 독특한 지형이다. 이들 암괴가 요철 지형을 이루며 쌓여 있기 때문에 그 틈새로 지하수를 많이 지하수를 많이 머금고 있으며, 보온·보습효과가 커 다양한 식물이 사철 자란다.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해 북방한계 식물과 남방한계 식물이 공존하는 세계 유일의 독특한 생태공간이 곶자왈이다. 생물다양성이 매우 풍부한 곶자왈의 가치가 제대로 알져지기 시작한 것은 거의 2000년대 들어서다. 곶자왈의 전체 면적은 110㎢로 제주도 전체의 6%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는 제주도에 분포하는 식물종의 약 46%(142과 896종)가 살고 있다.
가장 최근의 훼손사례는 제주도 동북부 교래·함덕 곶자왈 내에 개발된 에코랜드가 손꼽힌다. 제주시 조천읍 대흘리에 2009년 10월 개장한 에코랜드 골프장뿐만 아니라 바로 옆에 이듬해 문을 연 생태공원과 테마파크로 인해 여의도 면적의 절반에 가까운 3.34㎢규모의 곶자왈이 사라졌다. 이에 대한 반동이랄까. 에코랜드 개발 시점부터 제주도와 산림청, 민간 환경단체를 중심으로 곶자왈 보전운동에도 탄력이 붙었다. 보전 위주의 관광명소로서 제주돌문화공원과 교래자연휴양림은 이런 맥락에서 탄생했다.

◇ 교래곶자왈, 품이 포근한 공존의 공간
중산간지대에 눈이 간헐적으로 내리던 지난 4일 낮 곶자왈 지대에 조성된 최초의 자연휴양림인 교래자연휴양림을 찾았다. 제주돌문화공원 조성과 더불어 2009년 개장한 이 휴양림에는 휴양림 조성 이전을 포함해 두 차례 방문한 적이 있지만, 눈 덮인 교래곶자왈을 또 다른 신비감을 자아냈다. 교래곶자왈은 해발 400~600m로 다른 곶자왈지대에 비해 비교적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상록활엽수 외에 낙엽활엽수도 많이 공존한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낙엽이 떨어진 단풍나무, 서어나무, 졸참나무, 사람주나무, 때죽나무, 예덕나무 등을 짙푸른 송악이나 줄사철나무가 휘감고 올라간 모습이 보였다. 녹색 옷을 입은 거구의 유령이라고나 할까. 지난여름 태풍과 홍수 때 뿌리째 뽑힌 거목들이 곳곳에서 20㎝ 이상 쌓인 눈 이불을 덮고 있다.
한 두 사람의 발자국 이외에는 탐방로의 흔적도 찾을 수 없다. 양치식물들은 눈에 덮여 보이지 않고, 마삭줄, 으름덩굴 등의 덩굴식물이 길을 가로막는다. 움집과 숯가마터 등 곶자왈에 의지해 생계를 꾸렸던 옛 주민들의 흔적도 팻말 이외에는 눈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탐방로 눈 위에 굵고 커다란 짐승 똥을 발견했다. 양이 하도 많아서 노루나 말의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사진을 찍어 나중에 학자들에게 물어보니 오소리의 똥일 것이라고 한다.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오소리는 꼭 사람들이 다니는 길에, 같은 장소에서 볼 일을 본다고 한다. 발자국을 따라 한참을 걸었는데 이 오소리 똥을 다시 만났다. 어디선가 길을 잘못 들어 왔던 길을 되돌아 온 것이다. 다시 되짚어 가보니 삼거리에서 보라색 새비나무 열매에 눈길을 주다가 탐방로에서 벗어났음을 알았다.

◇ 물 건너온 투자이민과 물 지키는 공유화사업
2000년대 중반 이후 난립한 골프장들이 경영난을 겪으면서 골프장 건설 열기는 시들해졌지만, 최근에는 주로 중국인들의 무분별한 부동산 투자가 중산간지대를 다시 훼손하고 있다. 2010년 부동산 투자이민제가 시행되면서부터 분양형 콘도나 펜션 단지들이 우후죽순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3일 사려니오름 정상에서 내려다보인 눈 덮인 삼나무 숲과 크고 작은 오름들이 아름다운 중산간지대 곳곳에 중국인들이 조성한 펜션단지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제주도에 따르면 2010년부터 지난 8월말까지 제주도에 유치된 외국인 투자사업은 모두 1438건, 9597억원 규모에 이른다. 부동산 투자이민제는 외국인이 휴양콘도 등에 5억원 이상을 투자하면 국내 거주비자(F-2)를 주고, 5년이 지나면 영주권(F-5)을 허용하는 제도로 2018년까지 한시적으로 시행된다. 문제는 개발 부지의 상당수가 해발 200~600m 중산간 지역과 곶자왈 지대라는 점이다. 이런 곳은 지하수 함양원이자 생태계의 보고이다.
원희룡 제주지사는 7월말 기자회견에서 환경보전을 기반으로 한 투자개발 원칙을 제시했다. 그는 “제주도 가치의 기초 전제는 청정한 자연이고, 청정자연 기초 위에 2차적 가치를 더해야 새로운 가치가 창조될 수 있다”고 말했다. 당시 발표된 ‘대규모 투자사업에 대한 제주도의 입장’에 따르면 산록도로(해발 300~600m)를 기준으로 한라산 쪽으로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경관과 생태환경을 유지되도록 한다고 돼 있다. 즉 중산간지대는 보전을 원칙으로 한다는 것이다. 또한 한라산, 해안선, 오름, 하천, 습지, 동굴, 곶자왈, 문화재보호구역, 중산간 지하수 함양지대의 개발에 대한 보전기준을 통합하고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비한다.
기존 골프장을 숙박시설로 용도변경하거나 골프장 주변 토지를 매입해 숙박시설을 확대하는 등의 편법적 개발시도는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 정태근 환경보전국장은 “곶자왈의 경우 법률용어로 만들고 그 정의와 경계를 명확히 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라며 “보전기준 강화 이전이라도 적용기준을 가급적 엄격히 적용하겠다”고 말했다. 제주도는 내년에 지적(地籍) 예산 7억원을 들여 곶자왈 전역을 대상으로 경계를 짓기 위한 용역을 실시한다.
사유지인 곶자왈을 사들이는 작업도 활발하다. 산림청과 제주도는 2011년부터 지금까지 353만㎡(3.5㎢)의 곶자왈 사유지를 매입해 국유화했다. 곶자왈공유화재단도 곶자왈공유화사업으로 올해 사업비 21억원을 투입해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리 인근 약 34만㎡의 사유지 곶자왈을 매입했다. 2011년과 2012년에는 공유화운동의 첫 성과로 조천-함덕 곶자왈의 교래리 인근 13만㎡의 사유곶자왈 매입을 통해 곶자왈 보전을 위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보전 방안의 기틀 마련했다. 이런 노력들 덕분에 곶자왈 전체 면적 가운데 공유지는 44㎢로 전체 곶자왈의 약 40%를 차지하게 됐다.

◇ 동백동산, 습지가 품은 고유한 생태공간
비교적 낮은 지대에 위치한 선흘곶자왈내 람사르 습지보호구역인 동백동산을 지난 4일 방문했다. 비와 우박이 내려 곳곳에 웅덩이가 생겼다. 전 세계를 통틀어 제주도에서만 볼 수 있는 제주고사리삼을 비롯해 긴꼬리딱새, 팔색조, 비바리뱀, 개가시나무 등 멸종위기 동식물을 포함, 15종의 법정보호 동식물이 0.59㎢의 습지보호구역과 그 주변에 서식하고 있다. 한낮인데도 한밤중처럼 어두워졌다가도 빗방울이 몇 줄기 지나가고 나면 햇살이 구실잣밤나무의 높은 가지 끝 녹색 잎 사이로 뻗어 들어온다. 눈을 감으면 바람소리와 나뭇잎 서걱거리는 소리가 마음 속 잡념을 말끔히 씻어간다.
제주시 조천읍 선흘1리에 위치한 동백동산에는 상록활엽수종이 주로 분포한다. 구실잣밤나무, 종가시나무가 많아서 작은 열매들이 탐방로 바닥에 널려 있다. 동백, 황칠나무, 예덕나무, 사스레피나무 등도 많이 눈에 띈다. 동행한 ㈔제주생태관광의 고제량 대표는 “이름이 동백동산이지만 이곳 동백나무는 우점종인 종가시나무, 구실잣밤나무 등 키 큰 나무들에 밀려나서 크게 자라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대로 가다가는 덩굴식물로 진화할 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1971년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동백동산은 2010년 환경부가 습지보호구역으로 지정한 데 이어 2011년에는 람사르습지로 등록됐다. 동산 내 가장 큰 연못인 먼물깍에는 순채, 통발, 미꾸리낚시 등 다양한 수생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그렇지만 전부 1백만 평에 이르는 선흘곶자왈 가운데 습지보호구역은 5분의 1에도 못 미친다. 원래 산림청이 관할하는 국유림이라서 이중으로 보호구역을 지정하는데 산림청은 인색했다. 산림청은 “먼물깍만 습지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사실 세계자연유산, 천연기념물(이상 문화재청), 국립공원, 지질공원, 습지보호구역, 생태·경관보호지역(환경부), 국유림과 유전자원보호림(산림청) 등 여러 법정보호지역의 관할기관이 달라서 효율적 관리가 안 되고 있다. 특히 둘 이상의 보호구역이 중복지정된 곳 등에 대해 통합관리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 ‘질토래비’와 열어가는 생태관광의 가능성
동백동산은 탐방예약제와 해설사를 동반한 가이드투어를 의무화한 에코투어 대상으로 적합하다. 선흘1리 주민들은 원탁회의 등을 거쳐 만들어낸 프로그램으로 선흘1리만의 특선메뉴 개발, 마을 해설사 ‘질토래비’(길 닦는 사람)와 생태관광 해설사 양성, 선흘꽃 축제 개최 등 주민 스스로 생태체험 프로그램을 만들며 소득을 올리기 위한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마을 노인들의 토속적인 제주어 안내 프로그램은 제주관광의 정취를 더해준다. 4일과 5일 동백동산 습지센터에서는 환경부가 주최한 ‘생태나누리 성과보고회’가 열렸다. 고제량 대표는 특강에서 “선흘1리 주민들은 백서향과 제주고사리삼 복원사업, 습지 생물의 브랜드화 등을 통해 보전과 활용을 잘 병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고대표는 이장의 말을 인용해 선흘1리 생태관광의 궁극적 목표는 “선흘곶자왈 환경보존과 (수익배분이 아닌) 마을 공공의 복지 향상에 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동백동산 습지보호구역에는 별도의 예산이 부족해서 환경부가 공인하고, 인건비를 지원하는 자연환경 해설사는 현재 두 명 밖에 없다. 이웃한 세계자연유산 거문오름의 선흘2리 주민 30여명은 문화재청과 제주도의 지원을 받아 교육 등을 거쳐 해설사로 활약 중이다. 법정보호지역의 생태관광 진흥을 위해서도 여러 정부 부처와 지방자치단체의 보호지역 통합관리가 필요하다.
제주=임항 논설위원 hnglim@kmib.co.kr / 사진=구성찬 기자 ichthu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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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백동산 먼물깍에 머문 제주의 바람과 수생식물 / 제주고사리삼 / 말오줌때 열매 / 이끼가 깃든 동백동산의 속살 / 숯가마터 / 황칠나무 / 동백동산 탐방로 / 제주돌문화공원의 돌하르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