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정치 어디로 가나]2.진보정치는 왜 몰락했나...5무 정당

입력 2014-12-21 16:42

통합진보당이 헌법재판소로부터 정당해산이라는 극단적 처방을 받은 것은 종북주의 때문이다. 그러나 통진당은 다른 측면에서 스스로 몰락의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해산 직전 통진당의 정당지지율은 2%에 불과했다. 종북 논란을 제외하더라도 변화의 노력, 스타 정치인, 도덕적 명분, 대중적 지지, 내부통합 등 5가지를 이미 잃어버렸던 결과로 분석된다. 이러한 ‘5무(無)’ 정당은 통진당 만의 문제가 아닌 국내 진보정치 전체가 풀어야할 과제라는 지적이다.

◇진보정치, 변화와 스타 정치인 부재=통진당의 전신인 민주노동당은 지난 2000년 창당돼 국내 정치 지형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진보적인 각종 정책들과 담론들을 활성화시켰고, 우리 사회의 정책적·이념적 좌표들을 일정 부분 왼쪽으로 옮기는 데 기여했다.

예를 들어 2002년 16대, 2007년 17대 대선에 연속 출마했던 권영길 전 민노당 대표는 ‘무상급식·교육·의료’ 등 무상시리즈를 제기해 사회적 의제로 부각시켰다. 여야 보수 정당이 다루지 않았던 진보적 복지 이슈를 제도권 영역으로 끌고 나온 것이다.

그러나 2011년 통진당을 창당할 시점에는 이미 민노당 시절의 정치적 역량이 상당부분 사라진 상태였다. 민노당 출신 야권 관계자는 21일 국민일보와 통화에서 “통진당 창당 이후 진보정당들은 정책 기능을 상실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민노당 출신 다른 관계자 역시 “무상 정책, 부유세 등 민노당 때 만들어 놓은 것들을 우려먹는 수준”이라고 비판했다.

변화 대신 기득권 안주에 머문 결과 진보정치를 이끌 스타 정치인들도 사라졌다. 대선에 두 번 출마해 3%이상 의미 있는 득표를 했던 권 전 대표를 대체할 사람은 등장하지 않았다. 아직도 진보정치는 민노당 창당세력인 심상정 의원과 노회찬 전 의원, 국민참여당을 만들었던 유시민 전 의원 등에 의지하고 있다.

◇대중과의 분리=진보정치와 진보정당들이 대중으로부터 고립된 상태는 심각한 수준이다. 한국갤럽이 지난 16~18일 전국 성인남녀 1006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여론조사에서 통진당은 지지율 2%를 기록했다. 원내 유일 진보정당으로 남게 된 정의당 역시 2%다. 두 정당을 합치면 진보정당 지지율이 4%인데, 2012년 19대 총선 당시 통진당 정당득표율 10.3%의 절반이 안 된다.

거슬러 올라가면 민노당이 2004년 5월 기록한 정당지지율 21.9%와 비교하면 현재 진보정당 지지율은 5분의 1에 불과하다. 당시 TNS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열린우리당은 43.5%, 한나라당은 22.3%를 각각 얻었다(신뢰도 95%, 표본오차 ±3.7%).

통진당은 이정희 전 대표가 18대 대선에 출마했으나 “박근혜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 나왔다”는 일반 정서와 동떨어진 말을 남기고 사퇴했다.

진보정당들은 대중적 진보정치를 표방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대중적 지지를 많이 상실하고 있다. 정당이 대중적 지지를 얻지 못한다면 보수냐 진보냐를 떠나 소멸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는 지적이다.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진보정치의 최근 몰락은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을 증명하고 있다. 민노당은 당초 민중민주(PD)계가 주도해 창당했지만 종북논란을 일으킨 민족해방(NL)계와 충돌하면서 끊임없이 내부 분열을 거듭했다. 2006년 NL계가 연루된 일심회 사건으로 NL과 PD의 싸움은 격화됐고, 2008년 PD계열은 탈당해 진보신당을 차렸다. 이때부터 진보정치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두 정파가 건전한 경쟁을 통해 진보정치를 발전시키기 보다는 진보정치 에너지를 스스로 깎아먹었다는 비판이다.

◇도덕적 명분을 잃다=진보정치는 도덕성과 정치적 명분 등에서도 국민적 기대치에 미치지 못했다. 2012년 발생한 통진당 비례대표 부정선거는 진보정치의 도덕성에 큰 상처를 남겼다. 민주주의 기본원리인 절차적 민주성을 어겼고, 철저한 자기반성이 뒤따르지 않았다. 이 사태로 민주노총이 통진당 지지를 철회하는 등 진보진영이 본격적으로 통진당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통진당과 정의당은 야권 연대나 공천 과정에서도 정치적 명분을 잃는 모습을 자주 노출하면서 지지자들에게 실망을 안겼다.

엄기영 기자 eo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