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시인’으로 불리는 김남조 시인이 내년에 미수(米壽·88세)를 맞는다. 1927년 대구에서 태어난 김 시인은 서울대 사범대학 국문과를 나와 ‘목순’ ‘사랑초서’ ‘바람세례’ ‘심장이 아프다’ ‘귀중한 오늘’ 등 17권의 시집과 수필집 12권을 냈다. 한국시인협회와 한국여성문학인회 회장을 역임한 후 숙명여대 명예교수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한국시인협회상, 서울시문화상, 3·1문화상, 만해대상 등을 수상했다.
1987년부터 해마다 시를 형상화한 그림으로 ‘詩가 있는 그림展’을 열고 있는 서울 강남구 청담동 갤러리서림(대표 김성옥)이 올해는 김 시인의 대표시를 테마로 한 전시를 22일부터 내년 1월 10일까지 연다. 화가 13명이 김 시인의 시를 그림으로 재탄생시킨 작품을 선보인다.
대구에서 활동하는 노태웅 작가는 ‘겨울바다’를 눈 내린 바닷가 인근 풍경으로 담아냈다.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의 새/ 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 (중략)/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는/ 그런 영혼을 갖게 하소서/ 남은 날은 적지만/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인고(忍苦)의 물이/ 수심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황주리 작가는 ‘편지’를 꽃잎 속에서 기타를 치거나 어깨동무를 하며 서로 끌어안는 풍경으로 담아냈다.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었다/ 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중략)/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 구절 쓰면 한 구절을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 번도 부치지 않는다.”
김 시인이 살고 있는 서울 용산구 효창운동장 옆 자택에서 바라보면 광화문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과 마주하게 된다. 남편인 조각가 김세중(1928~1986)의 작품이다. 황 작가의 ‘편지’는 먼저 떠나보낸 연인에게 띄우는 애틋한 그림엽서 같다.
서양화가 전준엽은 ‘내가 흐르는 강물에’를 푸른 강과 소나무를 배경으로 그렸다. ‘무제 2’도 형상화했다. “그대가 나에게 처음으로/ 그대에게 내가 처음으로/ 산자락 개울가 정갈한 외딴집에/ 새 기름 새 심지로/ 불 켜고 마주 보는 그들이고저/ 그대가 나에게 마지막으로/ 그대에게 내가 마지막으로/ 쓰다 헐어진 헌 기름등잔에/ 알갱이 겨우 남은 성냥으로 불 켜고/ 남루야 어쨌거나/ 간절히 마주 않는 그들이고저.”
원로화가 박돈은 말을 타고 황야를 달리는 그림을 통해 ‘서녘’을 형상화했다. “사람아/ 아무러면 어때/ 땅 위에 그림자 눕듯이/ 그림자 위에 바람 엎디듯이/ 바람 위에 검은 강/ 밤이면 어때/ 안 보이면 어때/ 바다 밑 더 파이고/ 물이 한참 불어난들/ 하늘 위 그 하늘에/ 기러기떼 끼럭끼럭 날아가거나/ 혹여는 날아옴이/ 안 보이면 어때/ 이별이면 어때/ 해와 달이 따로 가면 어때/ 못 만나면 어때/ 한 가지/ 서녘으로/ 서녘으로/ 잠기는 걸.”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인 민경갑은 따뜻한 색채로 ‘봄날 1’을 풀어냈다. “타던 불 다 사위고/ 새로운 불붙은 불살들을 보시려면/ 창을 여십시오/ 성인 같은 덕성으로/ 억만초목이 돋아남을 보시려면/ 창을 여십시오/ 창을 여십시오/ 황량한 심사인들 아지랑이로 덥히는/ 참말로 사랑보다 더 좋은/ 대자연을 만나실 거예요/ 오늘은 이름도 안 붙은/ 어린 봄날일 거예요.”
안윤모는 ‘여행지의 벤치’를 그렸다. “처음 온 나라/ 낯선 사람들의 공원/ 햇빛 반 그늘 반인 벤치에서/ 나른히 최면 걸려/ 꿈꾸는 일이나 하네/ 먼저 세상에서/ 혹은 더 먼저 세상에서/ 예서 만날 약속 맺었고/ 오늘이 그날이라/ 지금 저만치 그가 오고 있다거나!/ 금가루, 은가루도/ 사륵사륵 내리는 아주 특별하고 몽상적인 이 벤치는/ 꿈속의 꿈이어라/ 꿈속의 꿈에서/ 누군가 그 사람이/ 옆에 와 앉을 일이어라.”
이영숙의 ‘바다’가 그립다. “바다여/ 나의 좋으신 분을/ 수평선 저 너머/ 네가 업어 뫼신 후/ 날마다 천도(天桃) 한 알을/ 상에 올리네/ 즈믄 날 만경창파/ 머리 풀어 바치는/ 나의 제사/ 어느덧 서리 묻은/ 내 귀밑머리/ 어쩔라나/ 어쩔라나/ 오늘은 여혼 안의 그 바다에도/ 하늘복숭아/ 가지만 휘어지고.”
정일의 ‘환한 경치’는 사랑스럽다. “선물상자/ 그 마지막을 열었더니/ 불시에 눈앞을 막아서는/ 사람 하나/ 천둥번개 내리쳐도/ 좋을 만큼의 축복인지/ 남의 상자 잘못 연/ 낭패인지/ 하여간 정치만큼은/ 참 환하다.”
한젬마의 ‘조국’은 의미심장하다. “누구나/ 배우지 않고/ 사랑할 줄 아는/ 그의 나라/ 불붙는/ 숯불 밑에 엎드려도 좋아라/ 역사에서 제일 슬픈/ 3·1 만세/ 만세/ 만세/ 이적지 핏속에 울리는/ 우리의 대한.” 김 시인의 대표시를 유명 화가의 그림으로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02-515-3377).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
김남조 시인 미수(88세) 기념 '시가 있는 그림전' 갤러리서림 황주리 '편지' 등 13명 작가 참여
입력 2014-12-21 14:21 수정 2014-12-21 14: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