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거창 풍계마을 할머니들이 정 총리에게 손편지 쓴 까닭은

입력 2014-12-16 17:15
국무총리실 제공

지난달 17일 정홍원 국무총리한테 연필로 꾹꾹 눌러쓴 ‘손 편지’ 5통이 배달됐다. 발신자는 경상남도 거창군 마리면 풍계마을에 사는 할머니 5명이었다.

강말순(82), 백소순(80), 김순분(79), 이필순(79), 신금순(73)씨 등 ‘할머니 5인방’은 지난 10월 9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한글날 경축식에 초대돼 서울 구경을 했다. 물론 초대자는 정 총리였다. 이 할머니들은 원래 경축식 초대인사 명단에 들어있지 않았다. 정 총리가 강씨 등이 백발의 나이에 한글을 배우는 모습을 방송프로그램으로 접한 뒤 감동한 나머지 이들을 갑자기 초대한 것이다.

그날의 나들이가 무척 기뻤던 할머니들은 가만있을 수 없었다. 그리고 어렵게 배운 한글로 손 편지를 써서 정 총리에게 보냈다. 삐뚤빼뚤하긴 해도 연필로 쓴 글씨가 한두 장씩 가득 채워져 있었다. 한 눈에 봐도 정성이 가득했다.

“한글을 배워 자식 먼저 보낸 어미의 심정을 글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게 억수로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러고 사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경상도 사투리 표현이 적당히 적힌 강 할머니의 편지에는 “하늘나라에 있는 아들한테 ‘보고 싶다’고 편지를 썼다”는 대목도 있었다. 편지 말미에는 “국무총리님 논에 가서 미꾸라지 잡아서 추어탕 끓려(끓여) 소주 한잔 드시로(드시러) 오이소”라고 적었다.

백 할머니는 “팔십 평생 부녀회장 하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더 큰 소원을 이뤄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며 “우리나라를 더 잘 사는 나라로 만들어 주시고 건강 하십시오”라고 썼다. 김 할머니는 “한글을 배워 약 봉투를 읽고 장날 시장에서 풍계마을 오는 버스를 남들한테 묻지 않고 타고 올 수 있어서 좋았다”고 적었다. 이 할머니는 “청국장 보글보글 끓이고 가을 무 쏘옥 뽑아 와서 채나물 무치고 손두부 만들어 총리님께 대접을 하고 싶다”고 했다. “거창에 한번 꼭 놀로(놀러) 와 주이소”라는 말도 들어 있었다.

정 총리는 며칠 동안이나 이 편지들을 양복 안주머니에 넣고 다닐 정도로 아꼈다고 한다. 지난달 25일에는 강 할머니에게 대표로 편지도 한통 보냈다고 총리실 관계자가 16일 전했다. 정 총리는 답장에서 “할머님께서 손수 써서 주신 편지는 제가 그동안 받은 어떤 편지보다 더 귀하고 정성이 담겨 있었다”고 했다. 또 “할머님들 사연을 읽으면서 제 마음까지 뭉클했다. 포기하지 마시고 한글공부계속해 달라”고도 적었다.

국립국어원이 2008년 내놓은 조사에 따르면, 읽고쓰는 능력이 아예 없는 비문해자(문맹)를 비롯해 단어는 읽지만 문장 이해능력이 없는 ‘반(半)문해자’ 등이 260만명이나 된다. 전체 인구의 7%에 해당하는 숫자다. 정부는 2010년부터 풍계마을 할머니들처럼 교육기회를 놓친 저학력·비문해 성인에게 한글을 교육하는 ‘성인문해교육’ 사업을 해오고 있다. 농어촌 지역에는 지자체 예산에 국비를 보태 한글학교도 운영 중이다.

정 총리는 한글날 할머니 5인방을 만난 자리에서 배석했던 김신호 교육부 차관에게 내년 성인문해교육 예산 증액을 당부하기도 했다. 국회에서도 정부 증액요청안 그대로 예산이 반영돼 지난해보다 약 10억원 늘어난 8억4300만원이 책정되며 지난 5년 이래 가장 큰 폭으로 늘었다.

백민정 기자 min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