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항 논설위원의 ‘그 숲길 다시 가보니’] 흰 눈 속에 반짝이는 초록빛 조엽(照葉)수림

입력 2014-12-15 17:58 수정 2014-12-19 08:56

일과 휴식, 의례적인 세미나 등 이런 저런 목적으로 제주도를 자주 가는 편이지만, 등산을 좋아하는데도 한라산 정상이나 정상부근까지 갔던 적은 서너 번에 한 번 꼴에 불과하다. 대부분 1박2일의 짧은 일정 탓이고, 궂은 날씨가 훼방을 놓은 경우도 많았다. 반면 가장 자주 간 곳은 비자림이다. 1991년 가을 온 가족이 제주도에 가서 택시를 대절했을 때 기사의 소개로 처음 비자림에 간 이후 이 원시림은 나의 단골 산책로가 됐다. 근년에는 취재 목적으로 제주도를 몇 차례 다니면서 사려니 숲길과 여러 오름들도 자주 찾는다.

◇ ‘삼나무 숲에 내리는 눈’
지난 3일 국립산림과학원 난대·아열대산림연구소의 안내를 받아 사려니 숲길을 남쪽으로부터 걸었다. 전날 내린 눈이 삼나무에 무거운 옷을 입혔지만, 영상 5~6도의 날씨와 간간이 비치는 햇살에 급속히 녹아내린다. 호젓한 탐방로 위로 눈 녹은 물이 비처럼 내린다. 사려니 숲길의 백미 중 하나인 ‘삼나무 숲에 내리는 눈’을 봤으니 이런 호사가 없다. 길 양 옆으로 일제 강점기에 조성된 삼나무 조림지와 자연림이 사이좋게 공존하고 있다. 동행한 숲해설가 박항순씨는 “삼나무는 빨리 자라는 나무로 경제성을 지니지만 조직이 물러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이 나무로 만든 일본군 전함은 더디게 자라지만 단단한 소나무와 느티나무로 만든 조선 전함에 번번이 깨졌다”고 말했다.
사려니숲길은 국유림 안에 난대림연구소가 조성한 한남시험림과 그 주변 임도를 걷기 편하게 만들어 2006년부터 일부를 개방한 것이다. 항상 개방돼 있는 북쪽 비자림로(1112번 지방도)의 입구나 동쪽 붉은오름이 있는 남조로(1118번)의 입구에서 걷기 시작해 출입이 통제된 곳에서 되돌아 나오거나 서로 다른 쪽 입구(출구)로 나가게 돼 있다. 반면 남쪽에서 올라가는 길과 입구 근처의 사려니오름은 5월의 걷기행사기간(15일부터 보름간)에만 무제한 개방된다. 이후 6월부터 10월까지는 탐방 2일전까지 100명에 한해 예약을 받는다. 나는 북쪽이나 동쪽 트레일은 여러 번 걸어봤지만, 남쪽 길은 이번이 처음이다.

◇ 누구나 생각을 내려놓고 걸을 수 있는 길
탐방로 옆으로 사람 눈높이에 참식나무의 붉은 열매가 보인다. 더 낮은 곳에는 사랑의 열매로 애용되는 백량금의 붉은 열매도 눈에 띤다. 작살나무와 새비나무는 보라색 열매를 달고 있다. 박항순씨는 “참식나무는 노란색 꽃과 파란색 타원형 열매가 10월에 동시에 나타난다”고 말했다. 길가에 심어 둔 황칠나무에 흰색 플라스틱 커버가 씌워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박씨는 “노루가 나무 줄기에 뿔을 가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수피가 상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황칠나무는 옛날부터 갑옷이나 용상(임금의 의자)에 노란색을 칠하는 도료로 요긴하게 사용됐다.
사려니의 어원으로는 ‘산의 안’이라는 뜻의 ‘솔아니’가 변해서 ‘사려니’가 됐다는 설이 있다. 그렇지만 난대산림연구소와 한라일보사 등에서 펴낸 ‘사려니 숲길’이라는 책에 따르면 ‘살’ 혹은 ‘솔’은 ‘신성한’ 또는 ‘신령스러운’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어쨌든 제주도민들 사이에서 사려니숲길은 ‘아무 생각 없이 걷는 길’로 통한다고 한다. 남녀노소 누구나 걸을 수 있는 평탄한 길이기 때문이다.
붉가시나무 군락을 지나 갈림길에서 삼나무 전시림 쪽으로 향했다. 잎 주위에 톱니가 거의 없는 붉가시나무는 박달나무처럼 재질이 단단해 가구재로 쓰인다고 한다. 누리장나무의 검푸른 빛 열매와 청미래덩굴의 붉은 열매도 눈에 자주 띈다. 비목, 생달나무, 센달나무, 흰새덕이 등 녹과무과 상록활엽수들이 보였다. 길이 평탄하지만 해발고도가 조금씩 높아지자 탐방로 위에도 쌓인 눈이 점점 더 깊어졌다. 이따금씩 노루 발자국이 찍혀 있다. 일제 강점기에 해발 450m 평지에 조성한 삼나무 전시림에는 90년생 삼나무들이 1850 그루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높이 30m, 밑둥치 지름 1m가 넘는 개체가 수두룩하다. 고개를 들어 나무 끝을 보기가 힘겹다.

◇ 제주도, 온대림과 난대림의 독특한 경계
되돌아 나오는 길에 사려니오름을 올랐다. 나무계단이 지겹지 않을 정도로 주변에는 동백나무, 후박나무, 팽나무, 사스레피나무, 박쥐나무, 합다리나무 등 다양한 수종이 나타났다. 그늘이어서 동백꽃이 잘 피지는 않지만, 이따금씩 흰 눈 속에 붉은 꽃잎이 선연하다. 제주도는 조엽(照葉)수림대에 속한다. 동백나무 등 차나무과와 참식나무 등 녹나무과 나무들은 잎 표면을 두꺼운 큐티클 층이 덮고 있어서 반짝반짝 빛이 나므로 조엽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조엽수림대는 제주도와 남해안의 좁은 해안지대, 일본 남부, 그리고 중국 남부로부터 히말라야에 이르는 지대에만 분포한다. 난대림연구소 김찬수 소장은 “제주도가 강수량이 적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열대우림이나 온대우림도 아니다”라며 “온대림과 난대림의 독특한 경계를 이룬다”고 말했다.
해발 523m인 정상에 도착하니 주변에 바다가 보인다. 풍경을 안내판과 맞춰 보니 동쪽으로 성산일출봉, 남쪽으로 문섬과 범섬, 서쪽으로 산방산, 북쪽으로는 물찻오름과 붉은 오름이 보인다. 중국인들이 최근 지은 펜션 단지도 눈에 들어왔다. 수려한 자연풍광에 다소 거슬리는 건물들이다. 숲길을 품고 있는 270㏊의 시험림에는 나도은조롱, 으름난초 등 법정보호종을 포함해 330종의 식물이 서식한다. 멸종위기종인 참매와 팔색조, 삼광조 등도 살고 있다. 좁은 탐방로 주변 바닥은 십자고사리, 고비고사리 등 양치식물들이 뒤덮고 있다.

◇ ‘오래 걷고 싶은 길 하나’
탐방을 마치고 나니 시구절이 떠오른다. ‘오래 걷고 싶은 길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보다 다섯배 열배나 큰 나무들이/ 몇시간씩 우리를 가려주는 길/(…)/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것들을 주체하기 어려운 날/ 마음도 건천이 된 지 오래인 날/(…)/ 한라산 중산간/ 신역(神域)으로 뻗어 있는 사려니 숲길 같은’ (도종환, ‘사려니 숲길’)
사려니숲길 주변 도로는 최근 성수기마다 불법 주차된 차량들로 극심한 정체를 빚고 사고 위험도 높다. 입구에 조성된 임간주차장은 차량 60여대만 수용 가능하지만, 주말에 하루 평균 300~400대씩 몰려들기 때문이다. 박항순씨는 “사려니숲길 남쪽 구간도 개방하라는 압력이 높은 실정”이라며 “그러나 무제한 개방할 경우 입구에 상점이 들어서고 숲 속에서 술 마시는 사람들이 늘어난다”고 말했다. 주차장이 확대되면 산림 훼손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사려니숲길은 다음 날인 4일 방문한 비자림 산책로와 대조적이다. 비자나무 숲은 자연적으로 생성된 반면 사려니숲길의 삼나무 숲은 조림된 것이다. 비자림은 1500원의 입장료를 받지만 사려니 숲길은 무료다. 비자림에 중국인 관광객들이 아직 단체로 들이닥치지 않고 있는 것은 유료인 덕분으로 보인다. 제주도에 따르면 올 들어 11월말까지 비자림 탐방객 52만5465명 가운데 외국인의 대부분(98%)인 중국인들은 1% 남짓인 6200여명에 불과하다.
제주시 도심(연동)에 있는 한라수목원은 입장료를 받지 않는 탓에 하루에도 버스 수십 대 인파로 몰려드는 중국인 단체관광객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일전에 이른 아침부터 한라수목원을 가 보니 온통 중국인들이 걸으면서 담배를 피우고, 시끄럽고…. 한라수목원도, 사려니 숲길도 비자림처럼 제주도민을 제외한 관광객으로부터 입장료를 받는 게 바람직할 것으로 보인다.
비자림은 조선시대에 조정이, 일제 강점기에는 마을 주민들이 도벌에 맞서 당번을 정해 총을 들고 지켰던 숲이다. 수령 820년의 ‘새천년’ 비자나무는 그렇게 지켜졌다. 약 45만㎡의 비자림에는 수령 400년 이상인 비자나무 2800여 그루가 자생한다. 비자나무는 바둑판 등의 목재로서도 훌륭할뿐더러 열매는 구충제, 강장제, 기침감기·황달의 약재, 등불기름 등으로 용도가 넓었다. 김찬수 소장은 “이런 울창한 자연림이 수백 년 동안 보전될 수 있었다는 것은 후세에 대단한 축복”이라고 말했다.
제주=임항 논설위원 hnglim@kmib.co.kr / 사진=구성찬 기자 ichthus@kmib.co.kr

[사진설명](위에서부터 순서대로)
- 제주시 조천읍 사려니 숲 삼나무 군락지 사이로 퍼져나가는 아침햇살 / 백량금 열매 / 간벌한 삼나무 위에 내린 눈 / 눈 덮인 숲길 속에서 더욱 도드라져 보이는 열매들 (왼쪽부터 새비나무, 참식나무, 천남성, 청미래덩굴, 덩굴딸기) / 비목나무 / 사려니 숲 삼나무 숲길 / 노루 뿔로부터 황칠나무 수피를 보호하기 위해 씌워놓은 플라스틱 커버 / 삼나무 전시림 탐방로의 누리장나무 열매 / 사려니오름 정상에서 바라본 구름 덮인 한라산 / 사라오름(뒤편 왼쪽)과 성널오름(성판악·뒤편 오른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