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생이여.”
가수 김광석이 부른 ‘이등병의 편지’ 노랫말의 마지막 구절이다. 입대를 앞둔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흥얼거렸을 법하다. 그렇지만 한창 나이에 2년 가까이 사회로부터 멀어져야 한다는 고립감에 요즘 젊은이들이 입대를 ‘다시 시작’으로 받아들이기 쉽지가 않다.
그러나 국군 병장 출신으로 기술 명장 반열에 오른 선배들은 “군 생활은 사회와의 단절이 아니라 연장”이라고 조언한다. 병과와 주특기에 따라 상황이 달라질 수 있지만, 군 생활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임하느냐에 따라 군 복무가 인생에 미치는 영향이 확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들은 ‘좋은 기술’을 연마할 계기를 모두 군에서 마련했고, 국방 의무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발전의 계기가 바로 군 입대라고 여긴다.
이들은 하나같이 일류대학 ‘간판’ 없이 오로지 군에서 갈고 닦은 기술과 집념을 토대로 대한민국 최고의 기술자 반열 올랐다.
◇보일러병 경력 살려 용접 부문 그랜드슬램 달성=김일록(52) 명장은 1978년부터 지금까지 30년 넘게 남들이 이른바 ‘3D 업종’이라고 기피하는 용접 분야를 연마해 2007년 고용노동부가 지정하는 ‘대한민국 용접 명장’에 선정됐다. 앞서 2000년 노동부 선정 ‘대한민국 신지식인’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김 명장은 용접뿐만 아니라 판금제관, 배관 등 3개 부분의 기능장을 석권해 그랜드슬램을 달성했고, 현재 동종업계 최고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맘 좋은 삼촌 같이 털털한 모습으로 “내 일을 즐길 뿐”이라는 그의 집념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김 명장은 27일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군에서 보일러 관리, 배관수리 등을 맡아 근무했다”고 말했다. 이어 “돌이켜 생각해보니 보일러병이 천직이 될 줄 알았는지 군 복무 내내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했다”고 했다. 무슨 잔고장이 나기라도 하면 귀찮게 느끼지 않고 그때그때 알아서 ‘쓱쓱’ 고쳤다.
군 생활은 기술뿐만 아니라 평생의 자산이 된 ‘끈기’라는 덕목을 함께 선사했다. 제대한 뒤 길게 이어진 ‘주경야독(晝耕夜讀) 시기’를 버틸 수 있게 해준 것이 오롯이 군 생활 덕분이었다는 말이다. 김 명장은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하며, 주중에 일해도 주말에 쉬지 않고 도서관에 갔다”고 젊은 날을 회고했다. 결국 35세의 늦깎이로 대학교에도 입학하기도 했던 그는 “군대 끌려간다고 생각치 말고, 발전의 계기로 받아들여라, 그럼 수많은 기회가 나중에 찾아온다”고 했다.
◇군 수송부에서 ‘잔뼈’ 굵은 자동차 명장=항상 ‘최초’ 꼬리표가 붙어다니는 박병일(57) 명장. 그는 1999년 세계 최초로 자동차 급발진 현상 원인을 분석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2002년 우리나라 최초의 자동차 명장이 됐다. 후학 양성에도 공을 들였다. 지금까지 그에게 자동차정비를 배운 인원이 20만명을 넘는다. 모두 무료로 가르쳤다. “아무도 못 고칠 정도로 망가진 자동차도 박 명장 손을 거치면 깨끗이 수리된다”는 말이 업계에 퍼질 정도로 명성이 자자하다.
1970년대 초반 그저 자동차 정비사를 희망하는 소년 견습생에 불과했던 그가 장인 반열에 오른 것은 군 생활이 일등공신이었다. 수송부 시절 엄청나게 많은 군용차를 수리한 게 기술 연마에 결정적 도움이 됐다는 것이다. 사회에서는 어림도 할 수 없었을 정도로 다양한 경험을 그때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워낙 자동차를 좋아했지만, 수많은 고장이 발생하는 군용 차량을 반복적으로 수리하는 일이야 말로 특별한 경험이었다. ‘단순 정비’를 넘어서 ‘고장 가능성’까지 예측하는 경지에 비로소 눈을 떴다고도 한다.
박 명장은 “남들 같으면 의무로 받아들였을 군 복무를 ‘성공의 밑바탕’으로 받아들인 점이 주효했다”고 털어놨다. 이어 “입대 전 이미 기술을 습득한 사람이라면 군 생활도 비슷한 분야로 자원해 숙련의 시간으로 활용하는 게 좋다”며 “군 생활로 자신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라”고 조언했다.
◇‘고졸 신화’를 쓴 ‘대기업’ 공장장=포스코 공장장을 역임한 임채식(61) 명장은 2005년 압연 명장에 선정된 뒤 2007년 대한민국 기능한국인으로 뽑혔다. 고령임에도 포스코의 외주제작사 임원으로 근무하며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다. 그는 비록 정비 관련 병과 출신은 아니지만, 군에서 갈고 닦은 인성이 성공의 배경이 됐다고 했다.
임 명장은 “군 생활을 가장 크게 얻은 성과는 모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 내 일을 끝까지 완수한다는 책임감”이라고 말했다. 제대 직후 대기업에 입사한 임 명장에게 밤과 낮이 따로 없었다. 낮에는 현장에서 기술을 연마했고, 밤이 되면 기술이론을 익히기 위해 독서 삼매경에 빠졌다. 과거 선배들은 기술을 쉽게 알려주지 않았다고 했다. 밤새 공부하며 어깨너머로 일을 배워야 하는 어려움에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군 생활의 어려움을 떠올리며 견뎠다. 메모하는 습관도 큰 도움이 됐다. 그는 수첩을 꺼내 보여주면서 “지금도 생각나는 것이 있을 때마다 기록한다”며 “문제해결의 열쇠가 되기도 하고, 공장 시스템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라고 설명했다.
◇병무청, “‘맞춤형 특기병 제도’ 활용하라”=세 명장은 ‘장인의 위치’에 오르기까지 군 경험을 활용한 선례다. 이들은 군 입대에 막연한 두려움과 거부감을 갖고 있을 후배들을 위해 병무청이 제작한 ‘대한민국 기술명장’ 릴레이 동영상에 출연했다.
동영상에서 이들은 “그저 시간이 가기를 바라는 사람에게 군대는 힘들고 지루한 곳일 수 있다”며 “하지만 뚜렷한 목표가 있는 사람에게는 소중한 기회의 시간, 내일의 자신을 위한 밑거름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군 생활을 ‘단절의 시간’으로 보낼지, ‘연속의 시간’이 되게 할지는 병역 의무에 임하는 후배 개개인의 몫”이라며 “아무쪼록 군 복무가 든든한 미래를 설계하는 ‘희망의 사다리’가 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병무청은 현재 입영 대상 청년의 사기 진작을 위해 군 생활을 사회 경력에 활용하는 방안을 적극 홍보하고 있다. 병무청이 추천하는 것은 ‘맞춤 특기병 제도’이다. 병무청은 입영 대상 청년들이 입대 전 원하는 복무 시기와 분야 등을 선택할 수 있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병무청은 “현역병 모집 제도를 활용해 특기, 적성, 전공, 원하는 직업 등에 맞춘 연계 분야의 입영이 가능해졌다”고 밝혔다.
유동근 기자 dkyoo@kmib.co.kr
[기획] ‘병장 출신 명장’ 의 조언 “군생활은 사회의 연장… 자기발전 계기로”
입력 2014-11-27 14: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