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항 논설위원의 ‘그 숲길 다시 가보니’] 선운산 애기단풍은 시와 노래가 되고

입력 2014-11-16 22:00 수정 2014-11-17 10:58

우리나라에서 단풍이 가장 고운 곳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나는 고창 선운산 도솔천 단풍나무 숲을 첫손에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물론 설악산 천불동계곡, 가야동계곡, 주전골 등도 아름답고, 오대산 선재길, 지리산 피아골 단풍도 그에 못지않다. 그렇지만 도솔천 양옆으로는 단풍나무가 우선 압도적 우점종이고, 애기단풍이라는 별칭처럼 작고 무성한 잎이 빨간색부터 초록빛까지 다양하고도 선명한 색의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200~300년씩 묵은 단풍고목의 잎이 계곡을 덮은 채 햇빛을 머금고 물 위에 그림자를 드리운 광경은 다른 곳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진경(珍景)이다.

◇ 선운산, 마음속의 단풍 일번지
지난 9일 오후 늦게부터 10일 오전까지 선운산 단풍 속에 묻혔다. 일요일인 오후 4시가 넘어 도착했지만, 단풍 관광인파는 탐방로를 가득 메웠고, 드넓은 주차장을 관광버스가 뒤덮고도 모자라 차도까지 일부 점령했다. 그나마 선운사는 몇 년 사이 단풍 인파가 부쩍 늘어났는데도 불구하고 진입로와 주차장이 넓어서 교통체증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내가 30년째 1~2년이 멀다하고 이곳을 찾는 이유는 언제 찾아도 군복무시절 집에 온 것처럼 마음이 푸근해지고, 그러면서도 늘 새로운 매력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동백숲, 장사송, 바위에 붙은 송악 등 천연기념물 세 가지, 새벽의 계곡 운무, 300년 수령의 배롱나무 네 그루, 선운산 낙조대의 일몰, 천마봉에서 한 눈에 바라보는 마애불과 내원궁, 그리고 도솔천 숲길…. 그러고도 초가을의 꽃무릇 절정기를 아직 보지 못했다.

◇ 애기단풍이 그린 선운사 절경
선운사 천왕문 앞에 섰다. 단풍나무와 느티나무 고목이 많은 곳이다. 전라남북도와 제주도에 분포하는 단풍나무는 중국 동북부와 전국에 분포하는 당단풍나무와 달리 잎의 크기가 작고, 잎의 열편이 5~7갈레로 갈라져 있다. 당단풍은 잎이 크고, 열편이 9~11갈레다. 일반적으로 단풍이 당단풍보다 색깔이 더 곱다. 더구나 이곳과 정읍 내장산, 장성 백암산 등에 분포하는 단풍나무 잎은 길이가 3~4㎝ 이하의 애기단풍이다. 앙증맞게 7갈레로 갈라진 단풍잎이 계곡과 사람들을 물들이면 모든 이들의 표정이 애기단풍처럼 환하고 온화해진다. 치열한 경쟁과 사람 스트레스에 찌들어 찌푸린 얼굴을 이곳에선 볼 수 없다.
천왕문 앞 극락교 주변은 도솔천 계곡에 비치는 반영(反影)이 가장 아름다운 곳 중 하나다. 동행한 문화관광해설사 강복남씨는 “봄에는 새싹, 여름엔 녹음, 가을엔 애기단풍, 겨울엔 설경이 수면을 수놓는다”며 “4계절 사진작가들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라고 말했다. 정말 그렇다. 봄에는 아기 손톱 크기로 삐져나오는 단풍 잎눈과 새싹이 물 속 햇빛에 반짝이고, 여름에는 하늘을 가린 짙은 녹음이, 가을에는 붉고 노란 단풍이, 겨울에는 앙상한 가지와 설경이 물 위에 파스텔화를 그려 놓는다.

◇ 선운사가 유난히 붉은 사연
선운사 뒤편 숲에는 3000여 그루의 동백나무 군락이 5000여 평에 걸쳐 30m 폭으로 가늘고 긴 띠 모양으로 조성돼 있다. 수백 년 전부터 방화림으로 계획된 것이다. 동백나무 숲은 화재 확산을 24분가량 지연시키는 것으로 실험 결과 확인됐다. 반면 소나무는 송진 성분 때문에 산불이 나면 불쏘시개 역할을 한다. 옛날 선운사의 사찰 경제를 크게 지탱했던 것은 동백기름과 동백 열매였고, 주변 민가는 소금, 특히 자염을 생산해 생계를 꾸렸다. 선운산과 주변에 소나무가 거의 없고, 단풍나무 느티나무 등 활엽수가 무성한 것도 자염 생산을 위해 소나무가 일찌감치 대거 벌채됐기 때문일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또한 선운사 경내의 만세루가 다양한 굵기의 기둥, 재활용한 기둥으로 세워진 까닭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실제로 굵기가 다른 두 개의 목재를 이은 기둥도 있다. 일본의 미술평론가 야나기 무네요시(柳 宗悅)는 만세루의 기둥에 대해 “이렇게 훌륭한 건축물을 본 적 없다”고 극찬했다고 한다.
강복남 해설사는 선운사 경내의 300년 묵은 배롱나무에 대해 “목백일홍 자미화 쌀밥나무 원숭이미끄럼나무 간지럼나무 등 별명이 가장 많은 나무 중 하나일 것”이라고 말했다. 꽃이 귀한 여름 한 철과 초가을에 꽃 공양을 위해 심은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한여름 온통 녹색뿐이던 숲길을 지나온 탐방객이 더위에 지쳐 있을 때 갑자기 만난 선연하게 붉은 꽃 대궐은 신선한 충격이다.

◇ 도솔천 계곡의 늦가을, 색상과 수종의 공존
이제 선운사에서 도솔암까지 3.2㎞의 단풍터널을 통과할 차례다. 다소 쌀쌀해진 아침 바람에 단풍 비가 내린다. “차라라락, 차락, 차락” 햇빛이 단풍잎을 통과하면서 붉게 물들어 계곡과 탐방객의 볼도 물들인다. 처음부터 끝까지 차가 다니는 넓은 길과 좁은 오솔길 가운데 선택할 수 있다. 양쪽 길이 번갈아 그 좌우를 감싸고 뻗은 도솔천 계곡은 2009년 9월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54호’로 지정됐다. 많은 사람들이 이 숲길을 선운산 일대 경관의 백미로 일컫는다. 선운사에서 차로와 보행로의 교차 갈림길까지 오솔길은 이미 사진작가들 차지다. 늙은 단풍과 어린 단풍나무, 다 떨어진 단풍과 아직 초록의 단풍이 어우러져 있다. 오른편 산언덕에도 단풍이 한창이다. 감홍난자(?紅爛紫)라는 말이 생각난다. 붉은 색이 무르익고, 자주색이 문드러진다는 뜻이다.
갈림길에서 산 속 오솔길로 접어드니 비가 내지 않았는데도 땅이 촉촉이 젖어 있다. 바닷가라서 새벽 5시 쯤 낮은 기온에 응결된 습기가 운무로 내려앉은 것이다. 단풍 빛은 넓은 찻길 가보다 못하지만, 잎이 연둣빛으로 물든 작살나무, 노랗게 물든 생강나무와 고로쇠나무, 그리고 당단풍, 신나무, 붉나무, 팽나무 등 다양한 수종을 볼 수 있다. 차로로 내려 오면서 단풍이 카펫처럼 깔린 곳을 몇 군데 지났다. 강복남 해설사는 “이곳에는 초가을, 특히 9월 15~20일경에는 틀림없이 국내에서 가장 긴 꽃무릇 카펫이 깔린다”고 말했다. 천왕문 건너편 주차공간이 가까워지자 길 주변에 너무 많은 단풍나무들이 비교적 평평한 산지를 가득 메우고 있다. 마치 단풍나무의 군단이 활엽수림에 촘촘히 포진해 있는 것 같다.

◇ 시가 되고 추억이 되어
선운사의 동백과 단풍, 그리고 꽃무릇은 너무도 많은 시와 노래의 소재가 됐다. 김용택, 도종환, 최영미, 안도현 등 비교적 인기 있는 시인들이 이들 소재를 담은 시나 산문을 썼다. 그렇지만 이 계절에는 아마도 선운사 단풍을 보고 썼을 서정주의 ‘푸르른 날’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 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 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전문)
나의 어머니는 1990년 11월 중순에 선운사에 다녀 온 후 ‘선운사 단풍이 너무 곱다’는 말이 입버릇이나 노래가 되었다. 입원하거나 고도근시인 눈이 말썽을 부릴 때 눈 감으면 선운사 애기단풍이 떠오를 정도라고 한다. 시각추억의 바탕화면이 된 것이다. 자녀들이 울긋불긋한 단풍을 배경으로 천왕문 앞 서어나무 고목에 올라타서 찍은 사진은 확대해서 보관중이다. 그 서어나무는 안타깝게도 2012년 태풍 볼라벤에 꺾여 등걸 일부가 지금은 아이들 학습용으로 활용된다.
도솔천변의 단풍나무 숲이 언제 어떤 이유로 조성됐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정유재란 이후 이 숲이 전란과 일제강점기를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단풍나무가 당시 목재로서는 쓸모가 적었던 덕분이라고 본다. 지난 8일 선운사의 하루 입장료 수입만 5000만원, 주차료수입이 1200만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니 장자가 말한 ‘무용(無用)의 용(用)’이 생각난다.
고창=임항 논설위원 hnglim@kmib.co.kr / 사진=구성찬 기자 ichthus@kmib.co.kr

[사진설명](위에서부터 순서대로)
- 전북 고창 선운산 도솔천 시냇물에 떨어진 단풍 낙엽 / 단풍 숲길의 추억 만들기 / 다채로운 빛깔로 물든 숲길 / 바위에 붙은 송악(천연기념물 367호) / 도솔천 계곡길에 내려앉은 단풍잎 / 다양한 색상의 단풍 / 선운산 생태숲의 별 궤적 / 태풍에 꺾인 서어나무 고목 / 도솔천에 비친 단풍 물그림자 / 선운산 용문굴 / 선운산 낙조대의 일몰 / 단풍 속에 깃든 도솔암 내원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