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항 논설위원의 그 숲길 다시 가보니] 새들의 천국, 운곡습지를 가보셨나요

입력 2014-11-13 22:01 수정 2014-11-16 19:19

새들의 천국, 운곡습지를 가보셨나요
보전과 이용의 갈등을 생태관광으로 풀어나가는 생물권보전지역

전북 고창군은 최근 몇 년 사이에 전화위복, 또는 불행이 행운으로 바뀌는 경험을 했다. 농공단지 이외에는 이렇다 할 공장지대가 없는 고창은 정부로부터 홀대받는 지역으로 치부됐다. 그러나 잘 보전된 자연 덕분에 고창군은 2013년 5월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됐다. 생물권보전지역은 유네스코가 생물다양성 보전과 지속가능한 이용을 조화시킬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인간과 생물권 계획(MAB)에 따라 전 세계적으로 생태계가 우수한 지역을 골라 지정한다. 우리나라에 설악산(1982), 제주도(2002), 신안다도해(2009), 광릉숲(2010), 고창(2013) 등 5곳 밖에 없다.
앞서 2008년 동림저수지가 야생동식물보호구역으로 지정된 것을 필두로, 2010년 고창·부안갯벌이, 2011년에는 아산면 운곡습지가 잇달아 람사르 습지로 등록됐다. 고창읍의 고인돌 유적은 이미 2000년 12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이들 다양한 보호구역이 일찌감치 1979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선운산과 더불어 고창군 전체를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인증하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격상시킨 것이다. 덕분에 관광객이 늘어났다. 선운사 탐방객이나 고창고인돌과 박물관을 보러 온 관광객이 운곡습지와 ‘고인돌 질마재 따라 100리 길(100리 길)’을 걷기 위해 하루를 더 머무르는 경우도 많아졌다.

◇ 너구리가 넘나드는 고인돌 고개
100리길의 제1코스인 고인돌길은 고창읍 고인돌박물관에서 시작해 고인돌유적지, 오베이골, 운곡서원, 상살비재에 이르는 8.9㎞의 산길이다. 기자 일행은 고인돌유적지 바로 옆의 탐방안내소에서 환경해설사 은희태씨의 안내를 받았다. 고창이 고향인 은씨는 지구과학 교사를 지냈고, 은퇴 직전에는 고창여중 교장으로 재직했다. 이곳 환경해설사 2명은 자격증 소지자를 대상으로 환경부가 채용한 계약직이다. 은씨는 “습지 생태계를 설명하는데서 보람을 찾고, 개인의 건강도 지킬 수 있다는 점에서 노후의 이상적 일자리”라고 말했다.
이곳 고갯길의 원래 지명은 다섯 갈래로 갈라진다는 뜻에서 오방곡, 오방골이었으나, 지역 사투리의 발음관행에 따라 오베이골이 됐다. 왼편에 고인돌들을 보며 300미터 가량 걸으니 아산면과 고창읍의 경계인 매산재에 도착했다. 길옆으로 찔레나무의 빨간 열매가 지천이다. 은씨는 “너구리가 많아 배수로는 아예 너구리 화장실”이라고 말했다. 고개를 넘어서니 갈참나무, 은사시나무가 우점하는 숲이다. 너구리뿐만 아니라 고라니, 멸종위기동물인 삵, 수달 등 비교적 큰 포유동물의 배설물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밖에도 구렁이, 황새, 새호리기 등 멸종위기 동물이 많이 살고 있다. 올 들어서는 역시 멸종위기종인 담비가 CCTV에 네 차례 포착되기도 했다. 국내 생태계 최상위 소비자인 담비가 서식한다는 것은 포유동물, 곤충 등의 먹이사슬이 건강하다는 뜻이다.

◇ 자연 스스로 삶을 이어가는 습지
곧 이어 나무데크가 습지 숲 속으로 안내한다. 버드나무, 갈참`졸참나무, 신나무가 많다. 단풍나무 대신 신나무와 화살나무가 가을 기분을 느끼기에 섭섭하지 않을 만큼의 붉은 색조를 흩뿌려 놓는다. 그밖에도 뽕나무, 꾸지뽕나무, 감태나무, 포플러, 쥐똥나무, 굴피나무 등이 보인다. 논두렁, 시멘트 벽돌이 일부 남은 집터 등 한때 논농사, 밭농사 짓던 민가가 있었던 흔적들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이곳의 땅은 산지임에도 원래 지하수가 많이 나와 오래전부터 논과 밭이 조성됐다. 그러다가 멀지 않은 전남 영광에 원자력발전소가 들어서면서 1982년 발전소와 주거단지에 식수를 공급하기 위해 운곡저수지가 조성됐다. 용계리, 운곡리에 걸쳐 9개 마을이 수몰됨에 따라 500~600여명이 삶의 터전을 잃었다. 당시 한전은 운곡 저수지 주변 땅도 사들였고, 수장을 피한 가구들도 대부분 논과 밭과 집을 버리고 도회지로 떠났다. 그 후 40여년이 지나 오로지 자연의 힘으로 습지가 복원된 것이다.
지상에서 50cm 이상 높게 설치된 목재 데크 길은 나무발판들 사이에 간격이 커서 유아의 발은 빠질 정도였다. 은씨는 “포유동물도 지나갈 수 있도록 하고, 데크 밑에 있는 식물들이 햇빛을 받아 광합성을 할 수 있도록 하게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단풍과 낙엽에 취해 목재 데크를 한 참 걷다 보니 작은 연못이 나타났다. 어리연꽃, 낙지다리, 개구리발톱, 애기골무꽃. 등 수생식물, 그리고 큰고랭이, 뚝사초, 이삭사초, 괭이사초 등 사초들도 많이 서식한다. 낙지다리는 못이나 도랑과 같은 습지에서 자라는 여러해살이 풀이다. 줄기 끝에 낙지다리의 빨판과 비슷하게 생긴 가지가 사방으로 뻗어 있다. 낙엽성 교목과 관목, 칡, 으름덩굴, 청미래덩굴, 인동초 등의 덩굴식물과 수생식물 등이 어우러져 다양한 수종을 자랑한다.

◇ 삶터의 경계에서 울리는 총소리
갑자기 총 소리가 세 번 울렸다. 개 짖는 소리와 멧돼지 울음소리도 멀리서 들렸다. 목재데크 길 초입에서 만났던 고창군 유해조수 구제단 소속의 엽사가 멧돼지를 향해 총을 쏜 것이 분명하다. 습지보호구역은 원래 수렵이 제한되는 곳이지만, 지방자치단체는 농작물에 피해를 주는 유해야생동물 개체수가 너무 많다고 판단될 때 환경부장관의 승인을 받고 연간 계획을 세워 포획할 수 있다.
운곡저수지를 끼고 도는 길과 동양 최대인 300t짜리 고인돌을 보고 돌아 나오는 길에 멧돼지 어미 두 마리가 피를 흘리며 마운튼 바이크에 실려 있는 것을 보았다. 네 명의 엽사들은 의기양양한 모습이었다. 엽사 4명이 방금 사냥한 암컷 멧돼지를 4륜 바이크에 싣고 있었다. 1시간 전 총소리를 감안하면 습지보호구역 안에서 사냥한 것이 확실했다. 다른 환경해설사인 김동식 전 고창영선고 교장이 젊은 엽사에게 말했다. “이 안으로 들어와서 사냥하면 안 됩니다. 탐방객들이 많이 오는데 총을 든 엽사와 특히 덩치 큰 사냥개를 보면 무척 불안해합니다.”
다른 엽사는 “농작물 피해 신고와 멧돼지 관련 민원이 폭주한다. 우리도 보호구역은 알고 있지만, 총을 맞은 멧돼지가 그 쪽으로 도망가면 쫓아가서라도 잡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동식씨는 “멧돼지도 어디로 가야 안전한지 알고 행동한다”며 “습지보호구역으로 들어 온 멧돼지는 더 이상 추격하면 안 된다”고 반박했다. 필요하다면 수렵 허가를 받아서 보호구역 안에 들어오라는 말이다. 환경부 새만금 환경청 관계자는 “해당 지역주민이 생계수단이나 여가활동으로 하는 수렵·채취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느슨한 규제여서 지역 주민에게는 규제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농민과 멧돼지의 갈등은 전국 어디서나 벌어지는 현상이다. 그렇지만 고창군에서는 한편으로는 습지보호구역을 지정해 놓고, 동시에 유해조수를 몰아낸다는 구실아래 야생동물을 사냥한다는 게 모순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결국 현재로서는 서로 한발씩 양보하고, 지역 주민들이 야생동물과의 공존 및 생태관광 활성화를 위해 수렵을 자제하도록 권장할 수밖에 없다.

◇ 언젠가 찾아 올 크낙새를 기다리며
환경부는 운곡습지를 품고 있는 아산면 용계마을을 강원 인제, 제주 선흘1리, 신안 영산도 등과 함께 생태관광 성공모델지역으로 선정했다. 주민들에게 자부심을 고취시켜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의 핵심지역으로서 보전 노력을 배가토록 하려는 배려다. 고창군 관계자는 “운곡습지 탐방객이 지난해 5300명에서 올해에는 10월말까지만 7291명으로 거의 배증했다”면서 “걷기와 자연에 대한 관심이 예상 밖으로 크다”고 말했다.
국립환경과학원은 습지보호지역의 생물종이 최근 몇 년 사이에 크게 증가했다는 내용의 ‘2013년 습지보호지역 정밀조사’ 결과를 최근 발표했다. 고창 운곡습지는 동식물 종수가 864종으로 지난해 조사대상인 5개 습지보호지역 가운데 가장 많은 곳으로 조사됐다. 2010년 조사에서는 527종이었으나, 지난해 조사에서 337종이 추가로 발견된 것이다. 환경부는 보호지역 지정의 효과가 입증됐다고 말했다. 특히 멸종위기야생동식물Ⅰ급인 황새와 Ⅱ급인 구렁이, 새호리기, 팔색조 등 4종의 멸종위기종이 운곡습지의 식구들로 새로 등록됐다. 그밖에 붉은배새매, 황조롱이 등의 천연기념물도 산다. 김동식씨는 “여름에는 원앙, 겨울에는 가창오리, 텃새로는 딱따구리가 많다”면서 “새들의 천국인 이곳에 멸종된 것으로 추정되는 크낙새도 복원했으면 한다”는 기대를 밝혔다.
고창=임항 논설위원 hnglim@kmib.co.kr / 사진=구성찬 기자 ichthus@kmib.co.kr

[사진설명](위에서부터 순서대로)
- 전북 고창 운곡습지의 수생식물들 / 습지에 남아있는 민가의 흔적 / 습지에 깃든 늦가을 풍경 / 노랑어리연꽃 / 습지 탐방로의 나무데크 / 습지의 모양을 형상화한 안내판 / 운곡저수지의 물오리 / 낙지 빨판 모양을 닮은 수생식물 낙지다리 / 100리 길 제1코스 시작점의 고인돌유적지 / 동양 최대 300t 고인돌 /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고인돌유적지의 만추(晩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