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항 논설위원-그 숲길 다시 가보니] 금강송이 꿈꾸는 소나무 왕국, 소광리 금강송 숲은 어떻게 수탈을 피했을까
경북 울진군 서면 소광리 일대는 한국 소나무의 원형, 그 소나무 가운데서도 재질이 가장 단단한 금강송의 국내 최대 보전지로 통한다. 전기가 1985년에야 들어 왔다는 소광리와 그곳에서 보부상 12령길로 이어진 북면 두천리 일대는 4년 전 금강소나무 숲길이 개통되면서 큰 변화를 겪었다. 밭농사를 짓고, 송이버섯을 캐며 살던 30여 가구씩의 마을들이 봄부터 가을까지 탐방객을 안내하고, 도시락을 만들어 팔고, 식당을 운영하느라 제법 바빠졌다. 소득도 적잖게 늘었다. 산림청과 사단법인 숲길이 국비를 들여 조성한 이 숲길을 지난달 14일 다시 찾았다.
◇ 하늘이 열어 준 숲길
울진에 도착한 다음날인 13일에는 가을이 한창이건만, 마지막 태풍이 지나간 금강소나무 숲길 제3구간의 초입 임도에 계곡 물이 불어나는 바람에 금강송 군락지에 들어갈 수 없었다. 지난 5월에도 집중호우 탓에 한 차례 방문계획을 접어야 했다. 숲길 안내를 맡은 한국등산트레킹 지원센터의 방의수 사무국장은 비가 많이 내린 지난 8월 한 달간은 탐방로를 거의 폐쇄하다시피 했다고 말했다. 이곳을 탐방하려면 인터넷을 통해 미리 예약을 해야 하고, 탐방인원도 하루 80명으로 제한된다. 그러고 나서도 날씨가 좋아야 비로소 금강소나무를 만날 수 있으니 그야말로 귀한 해후가 아닐 수 없다. 기후변화 탓에 사계절 할 것 없이 ‘3대가 덕을 쌓아야 지리산에서 비를 안 만난다’고 한 요즘 등산 애호가들의 하소연이 생각난다.
북면 두천1리에서 시작되는 금강소나무 숲길 제1구간(13.5㎞)이 끝나는 소광2리 마을회관 겸 주막에서 제3구간(18.7㎞)이 시작된다. 저진터재와 너삼밭재를 지나 소광천 임도까지(3㎞)는 1구간과 겹치는 순탄한 산길이다. 붉나무, 신나무, 벚나무 등의 벌건 단풍과 신갈나무, 굴참나무, 생강나무의 노란 단풍이 터널을 이룬 좁은 탐방로에 도토리, 밤, 잣 등이 널려 있다. 올해 견과류가 풍년이라서 사람도 동물도 아직 거두어가지 않은 토실토실한 열매가 안에 들어있는 것도 많다. 잣송이 가운데는 길이가 무려 15㎝에 이르는 것도 있다.
◇ 그곳에 우리 소나무가 있었네
탐방로는 불영계곡에 합류되는 소광천을 따라 지그재그로 이어진다. 임도를 걷다가 지겨울 때쯤 되면 숲 속으로 인도된다. 어느덧 화전민터에 이른다. 이곳에는 캠핑장까지 갖춘 사유지가 있다. 방 국장은 “금강송 숲길의 운영취지와 경관에 어울리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현재 금강송 숲길은 산림청이 한국등산트레킹 지원센터에 운영을 위탁해 놓았다. 숲길 조성과 초기 운영은 지역주민들이 참여하는 비정부기구(NGO)가 참여하는 협의체인 사단법인 울진숲길이 맡았었다. 탐방객들을 인솔하는 숲 해설사는 마을 주민 가운데 2년간 교육을 받은 사람이나 산림청 계약직 직원들이 담당하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는 소나무다. 산림청 조사에 따르면 소나무를 가장 좋아하는 국민은 전체의 67.7%였다. 산림학자 전영우 국민대교수는 우리나라 소나무가 지역에 따라 제각각 다른 형태를 띠고 있다면서 소광리 금강소나무를 ‘우리 소나무의 원형’이라고 말한다. 전 교수는 저서 ‘나무와 숲이 있었네’에서 “소광리 소나무 숲이 소나무의 원형을 가장 잘 보전하고 있으므로 우리나라의 대표적 소나무 숲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라고 썼다.
◇ 금강송이 이어주는 삶과 죽음
금강소나무 관리사에 도착했다. 이곳부터 본격적인 금강송 군락지가 펼쳐진다. 울진국유림관리소 소속 김원동 해설사가 기자 일행을 금강소나무전시관으로 안내했다. 금강송은 붉은 색깔의 줄기가 굽어들지 않고 곧게 자란다. 나무에 박힌 가지의 그루터기인 옹이가 없는데다 성장속도가 느려서 나이테가 다른 소나무에 비해 훨씬 더 조밀하게 형성돼 있다. 실제 전시된 금강송과 일반 소나무 절단면을 비교해 보니 나이테 간격이 다른 적송보다 배 이상 좁다. 따라서 목재 재질이 단단하므로 선박과 건축재로 가장 좋은 대접을 받았다. 벌목된 금강송이 봉화 춘양역에 집결된 뒤 서울로 배달된다고 해서 춘양목이라고 한다. 또한 유난히 노란 빛깔을 띠는 송진이 노란 창자 같다고 해서 황장목(黃腸木)이라고도 한다. 머리가 희끗한 김원동 해설사는 “황장목 줄기의 가장자리를 일컫는 변재는 제거하고 황갈색이 더 짙은 심재만 3년간 말린 후 왕실에서 쓰는 관을 짰다”고 설명했다.
관리사에서 조금 더 걸어가니 3구간의 하이라이트인 오백년 소나무가 멀리서도 눈에 확 들어 온다. 조선 성종 때인 1480년쯤 탄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530여년생 금강송은 키가 23m에 가슴높이 지름이 96㎝에 이른다. 김원동씨는 이 나무에 기생하고 있는 식물을 찾아보라고 해서 살펴보니 나무 높은 곳 가지에 갈참나무가 자라고 있는 게 보였다. 아마도 어치 쯤 되는 새가 도토리를 숨겨 놓았던 게 싹을 틔운 것이다. 김씨는 “연로한 금강송들은 대개 속이 비어 있기 일쑤”라며 “결국 어느 순간 비바람에 꺾여 다른 생명들에게 길을 내줄 것”이라고 말했다.
◇ 하늘을 빗질 하듯 솟은 소나무 군락
울진 금강송 군락은 조선시대 숙종(재위 1674∼1720) 때부터 보호했다. 숙종은 궁궐의 기둥이나 왕실의 관으로 사용되는 금강송을 보존하기 위해 황장봉계 표석을 세우고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했다. 그 흔적이 소광천과 만나는 대광천 계곡에 황장봉표로 새겨져 있다. 이런 철저한 관리 덕분에 그나마 이곳에는 200~500년 이상 된 금강송 8만여 그루가 하늘을 빗질 하듯이 높게 치솟아 있다. 이어 1959년에는 국내 유일의 육종림으로, 2001년에는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으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다.
임도를 따라 조금 더 올라가면 임도 옆으로 더 높은 곳 100여m 떨어진 곳에 ‘못생긴 소나무’가 자리잡고 있다. 이 역시 500년 이상 된 금강소나무로 높이가 23m, 가슴높이 둘레가 3.5m에 이른다. 삿갓재로 향하는 임도의 막바지 능선 바로 아래에 미인송이 있다. 수령은 350년, 높이는 35m, 가슴높이 지름이 82㎝다. 500년생 소나무에 비해 줄기가 더 가늘지만, 키는 더 크다. 비교적 더 젊은 만큼 솔잎이 더 푸르고 왕성하다는 느낌을 준다. 임도 주변으로 미인송보다 줄기가 더 가늘지만 키는 모두 20m가 넘는 낙락장송들이 즐비하다.
◇ 노거수가 굽은 사연
사실 소광리 금강송이 비교적 오랜 세월 버텨 온 배경에는 다소 슬픈 사연이 있다. ‘못 생긴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속담처럼 웬만한 산의 소나무 가운데 곧게 자란 것은 죄다 베어가고 휘고 굽은 나무들만 살아남았다. 그렇지만, 산간오지라서 크고 곧게 자란 소나무를 베어내기 어려운 곳은 사정이 달랐다. 소광리 일대의 금강송이 곧게 자라는 유전자를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지리적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점이었다.
소나무는 이 땅의 어떤 나무들보다 건축재나 조선재로 활용도가 높다. 전영우 교수에 따르면 인구가 많았던 바닷가나 평야 및 야산의 소나무들은 농경문화를 지탱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벌채를 피할 수 없었다. 곧게 자라는 소나무들은 명대로 못 살아 자손을 제대로 퍼뜨리지 못한 반면 굽은 소나무들은 자손을 번식시켜 오늘날 굽은 형태의 소나무만 남게 됐다. 충남 태안 안면도의 소나무 숲, 서산 개심사 입구의 소나무 숲을 보면 소나무들이 대개 줄기가 S자로 굽어 있다. 반면 울진 소광리, 북면 두천리 일대는 운반수단이 들어가기 어려웠고, 임도가 뚫린 후에도 아름드리 소나무 토막을 소달구지로도 운반하기 어려웠고, 소광천의 깊지 않은 물길로 실어 나르기도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다른 곳에서 찾아 볼 수 없는 200년~500년생 소나무 숲이 보전된 것이다. 반면 불영계곡 건너편의 왕피천 숲의 금강송만 해도 물길이 넓고 깊은데다 동해가 가까워 지속적으로 벌채되어 지금 노거수는 찾을 수 없다.
◇ 솔향 따라 찾아가는 소나무 숲길 여행
이제는 왔던 길을 되짚어 내려간다. 금강소나무전시관 앞에는 울진 금강송을 노래한 안도현 시인의 시비가 있다. “아침에 한 나무가 일어서서 하늘을 떠받치면/ 또 한 나무가 일어서고 그러면/또 한 나무가 따라 일어서서/ 하늘지붕의 기둥이 되는/ 금강송의 나라” (‘울진 금강송을 노래함’ 중에서)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소나무 가지를 끼운 금줄을 쳐서 아기의 탄생을 알리고, 소나무로 만든 집에서 살면서 소나무 장작을 태워 지은 밥을 먹고, 소나무로 만든 관에 들어가 솔밭에 묻혔다’고 한다. 그런 소나무 숲길이 우리나라 탐방예약제, 공정여행·책임여행의 사실상 첫 모범사례로 자리매김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워 보인다. 소광2리 숲길운영위원장인 김진업(60)씨는 “이제는 숲길 트레킹 운영이 잘 정착됐다고 본다”면서 “도시락 판매와 주막 운영에 따른 수입은 30가구에 골고루 배분하고 있다”고 말했다.
금강송 숲길 제1구간은 바지게꾼들이 소금과 말린 생선 등을 등에 지고 넘던 보부상 12령 길이라서 역사적 정취와 문화가 어우러진 곳이다. 과거 호랑이와 산적에 희생되기도 했고, 주막에서 과음해 짐을 털리기도 했을 보부상의 애환을 떠올릴 수 있다. 반면 3구간은 금강소나무 숲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길이다. 방 국장은 “현재 조성중인 금강송 숲길 4구간과 5구간에는 12 고갯길의 역사적 상징물들을 만들어 곳곳에 세우려고 한다”고 말했다. 울진군 서면은 농산물 브랜드로 ‘금강송’으로 정했고, 행정구역 명칭을 금강송명으로 바꾸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서면 소광리와 북면 두천리는 교통이 발달한 지금도 첩첩산중, 두메산골이다. 그곳은 세상과의 단절, 혹은 자발적 은둔을 의미했다. 시인 김명인은 ‘너와집 한 채’에서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의/ 버려진 너와집이나 얻어 들겠네”라고 한 후에 “매봉산 넘어 원당 지나서 두천/ 따라오는 등뒤의 오솔길도 아주 지우겠네/ 마침내 돌아서지 않겠네”라고 읊었다. 그러나 이제는 비록 적은 수이지만, 탐방객들이 두메산골에도 들이닥친다. 그 옛날 화전민이 그랬듯이 너와집에서도 사람이 그리우면 탐방객 무리에 슬쩍 끼어들어 함께 걷다가 막걸리라도 나누며 옛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을까.
울진=임항 논설위원 hnglim@kmib.co.kr / 사진=구성찬 기자 ichthus@kmib.co.kr
[임항 논설위원-그 숲길 다시 가보니] 소광리 금강송 숲은 어떻게 수탈을 피했을까
입력 2014-11-05 2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