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청와대의 각종 회의 풍경이 사뭇 달라졌다. 이른바 ‘적자생존(적는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우스개 소리)’의 법칙이 사라진 것이다. 얼마 전부터 박근혜 대통령이 주재하는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나 국무회의에서 참석자들이 고개를 숙인 채 일제히 박 대통령 발언을 받아 적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적자생존이 사라진 것은 지난 6월말 2기 내각과 3기 청와대 참모진 출범 이후부터였다. 이후 청와대 수석들이 모여 “좀 분위기를 바꿔보자”는 얘기를 주고받았다고 한다. 그러다 ‘펜 들고 숙제하듯 대통령 발언만 쓰는’ 모습을 없애자는 데 의견일치를 봤다는 전언이다. 청와대가 상명하달식으로 경직된 곳으로만 비쳐졌다는 반성도 나왔다. 청와대 관계자는 최근 한 사석에서 “그때 우리가 다른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왔고, 다들 동의했다”고 전했다.
‘적자생존’은 박 대통령의 트레이드마크와도 같았다. 어떤 현장에서도 꼼꼼하게 상황과 내용, 대안 등을 깨알처럼 메모하는 박 대통령의 습관에 많은 국민들이 감명을 받았다. 한때 ‘수첩공주’라는 별명과 꼬깃꼬깃 접은 메모지가 유행하는 현상도 발생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청와대의 불통(不通) 이미지를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대통령의 사람들’은 바로 이런 연유로 마치 ‘도원결의(桃園結義)’식으로 메모 중단을 결의한 것이다. 이후 각종 청와대 회의에선 참석자들이 드문드문 키워드 정도만 적는 식으로 바뀌었다.
박근혜정부 출범 초기에는 잘 보이지 않던 열띤 토론도 최근 2~3개월 사이 국무회의 등에서 벌어지곤 한다. 박 대통령이 뭔가 지시하면,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부연하고 장관들이 갑론을박 구체적인 국정운영 방침에 대해 논의하는 식이다. 최근 주요회의에 참석했던 한 인사는 4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토론이 벌어지면 대통령이 흐뭇하게 바라본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박 대통령이 자유로운 토론과 분위기를 좋아하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각종 비공개 회의와 행사에서 정확하게 참석자들 발언 포인트를 파악하는 능력을 선보여 주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다는 것이다. 다른 청와대 관계자는 “대통령의 이런 모습이 국민한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아쉬울 때가 많다”고 했다. 앞으로 청와대 내 ‘자유로운’ 업무 분위기가 확산될 것이란 전망도 이런 연유에서 나온다.
물론 반론도 존재한다. 아직도 철저한 상명하달과 경직성이 청와대를 지배하고 있는 만큼 한시적 실험에 그칠 것이라는 시각이다. 단적인 사례가 바로 세월호 참사 이후 7개월 가까이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열리는 김기춘 비서실장 주재 수석비서관회의다. 모든 일에 항상 대응해야 한다는 취지지만, 주말과 공휴일을 모두 반납한 채 출근해온 참모들은 만성피로에 시달린다. 비상근무를 ‘지시하는 사람’은 있어도 ‘해제하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다.
일부 청와대 수석들의 공식 브리핑도 예외가 아니다. 박근혜정부 출범 때부터 재직 중인 한 수석은 춘추관에 내려와 ‘보도자료 낭독’만 한 채 돌아가기 일쑤다. 이 수석은 “괄호 열고~괄호 닫고” 등 문서 내에 기재된 부호까지 읽는 수준이다. 수석들이 먼저 여유와 유연성을 갖지 않으면 오랜만에 찾아온 ‘무(無) 적자생존 시대’는 오래가지 않으리라는 지적이다.
남혁상 기자 hsnam@kmib.co.kr
[정치인사이드]청와대 '적자생존'이 사라졌다
입력 2014-11-04 16: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