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포통장의 진화’…가상계좌까지 동원, 입금부터 출금까지

입력 2014-10-31 17:32 수정 2014-10-31 21:41
가상계좌로 인터넷 도박과 각종 사기 등 2조원대 불법거래를 도운 일당이 붙잡혔다. 이들은 가명 개설이 가능해 추적이 어려운 가상계좌를 일종의 대포통장으로 악용했다.

경찰청 사이버범죄대응과는 은행에서 발급받은 가상계좌를 범죄자에게 제공하고 부당이익을 챙긴 혐의(전자금융거래법 위반 등)로 이모(50)씨 등 3명을 불구속 입건했다고 31일 밝혔다.

가상계좌를 이용한 포인트 적립 사업을 하던 이씨는 지난 4월부터 9월까지 다른 2명과 함께 스포트토토를 비롯한 도박 사이트 운영자 등에게 가상계좌 약 5만개를 제공하고 입출금 수수료로 15억원가량 챙긴 혐의를 받고 있다.

실제 범죄에 사용된 가상계좌는 1만2000개 정도다. 불법 도박뿐 아니라 다단계와 인터넷 판매 사기, 대출빙자 사기, 보이스피싱(전화금융사기), 조건만남 사기 등 각종 범행에 쓰였다. 경찰이 적발하기까지 4개월간 불법거래 규모는 2조원 정도다.

가상계좌는 실제 은행 계좌(모계좌)에 딸린 연결계좌로 계좌번호를 닮은 전산코드다. 가상계좌로 입금된 돈은 모두 모계좌로 들어간다. 업체 측에서 돈을 입금한 사람이 누구인지 식별하기 위한 방법으로 쓰인다. 은행은 가상계좌 사용 신청을 받으면 사업 규모에 따라 10만개 단위로 내준다.

가상계좌는 모계좌와 달리 가명으로 여러 개를 만들 수 있다. 경찰 관계자는 “단속이 심해 구하기 힘든 대포통장과 달리 가상계좌는 추적이 어렵고 필요할 때마다 계좌를 바꿔가며 사용할 수 있다”며 “피의자들은 도박자금 세탁과 자금 은닉의 효용성을 강조하며 대량으로 유통했다”고 말했다.

가상계좌는 입금에만 쓸 수 있지만 이들은 별도 프로그램을 만들어 출금까지 가능하게 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씨 등은 3개 은행에서 각자의 명의로 6개 계좌를 만들고 이를 기반으로 약 95만개의 가상계좌를 만든 것으로 조사됐다.

경찰은 이씨 등에게 가상계좌를 내준 은행을 상대로도 범행 공모나 의무 위반 여부를 조사 중이다. 은행은 거액 금융거래 같은 이상 징후가 포착되면 금융정보분석원 등에 신고해야 한다. 해당 은행들은 불법거래가 이뤄지는 4개월간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경찰은 전날 금융위원회·금융감독원 등 유관기관과 실무회의를 열고 무분별한 가상계좌 유통을 막기 위한 방안을 논의했다.

강창욱 기자 kc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