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의 공간, 일본 홋카이도 시레토코 국립공원

입력 2014-09-30 21:20 수정 2014-09-30 22:22

소설가 얀 마텔의 작품 ‘파이 이야기’에는 열여섯 살 소년과 사나운 벵골 호랑이가 작은 구명보트에 실려 단둘이 바다를 표류하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영화로도 제작된 이 소설은 은유적으로 사람과 동물 사이의 관계와 공존 문제를 배경이 된 상황에 담아내고 있다.
소설에서 다뤄진 것처럼 야생동물과 인간의 공존은 현실적으로도 첨예한 과제다. 인간의 영역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동물들은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최근 국내에서도 지리산 반달가슴곰 복원사업 10주년을 맞아 야생동물과 인간의 공존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현실적이고 지속가능한 더부살이의 모델이 절실한 상황에서 좀 더 일찍 비슷한 경험을 한 일본의 사례는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안겨준다.

◇ 천혜의 자연에 깃든 공존의 풍경
일본 홋카이도(北海道) 동북단 반도에 위치한 시레토코(知床) 국립공원은 공존의 실험이 이상적인 선례를 만든 대표적인 공간이다. 일본 소설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가 ‘검은 날이 바다로 튀어나온 듯한 형태’라고 묘사한 이 지역은 홋카이도 원주민인 아이누족의 말 ‘시리에-토쿠(대지의 끝)’에서 그 지명이 유래했다. 지난 2005년 7월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이곳 국립공원은 야생의 숨결이 인간의 배려와 온전하게 조우하는 공간으로 정평이 나 있다.
다양한 수종의 울창한 원시림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자연환경 속에서 불곰과 에조사슴(홋카이도 꽃사슴), 에조리스(청설모) 등의 야생동물들이 뛰놀고, 그 위를 흰꼬리수리와 시마후쿠로(홋카이도 수리부엉이) 등의 희귀조류들이 날아다닌다. 800여종에 이르는 다양한 고산식물을 비롯해 시레토코 스미레(제비꽃) 등의 희귀식물도 곳곳에 서식한다.
이곳 국립공원의 농밀하고 잘 보존된 자연에는 원래 야생이었던 공간에 찾아든 인간들의 시행착오와 그에 따른 각성, 그리고 주도면밀한 실천이 깃들어 있다.

◇ 다시 불곰들이 살 수 있는 땅으로
특히 시레토코의 터줏대감인 불곰(ヒグマ·緋熊)은 그 모든 회복의 과정에서 특별한 상징성을 지닌다. 수천년 전부터 이곳에서 인간과 함께 살아온 불곰은 원주민들이 신(神)을 뜻하는 ‘카무이’로 부를 만큼 신성시했던 존재였다. 하지만 홋카이도 개척 이후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무분별한 포획 등으로 불곰의 개체수는 급감했고, 전후 경제 팽창기의 부동산 투기와 난개발 열풍을 거치면서 불곰은 멸종위기에까지 직면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일본정부는 지난 1964년 6월 시레토코 반도 내 386㎢ 지역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했고, 국립공원 내 구역을 세분화해 그 중 5분의 4 이상의 지역을 사람의 출입이 통제되는 특별보호구역으로 만들었다. 이후 꾸준하게 추진된 보호정책에 힘입어 불곰을 비롯한 야생동물들의 서식환경이 회복됐고, 늘어난 개체수로 인해 사람들과의 접촉을 관리해야 할 정도로 상황이 호전됐다.
지난 17일 일본 환경성 현지 사무소에서 만난 마츠나가 아키미치(松永秋道) 주임은 “불곰의 경우 일본 국내외적으로도 유례가 없을 만큼 높은 면적당 서식 밀도를 보이고 있다”고 설명하며 “핵심 관리지역에선 인위적인 개입을 배제하는 방침과 함께 곰보다 도리어 사람을 관리하는 일에 중점을 둔다”고 밝혔다. 마츠나가 주임은 “불곰의 출몰 가능성에 따라 시기별로 관리 프로그램을 운영한다”면서 “균형 있는 탐방문화 정착을 위해 국립공원 방문객들을 대상으로 홍보활동과 사전교육을 강화하는 중”이라고 덧붙였다.

◇ 주민들의 힘으로 지켜낸 땅
정부 차원의 집중적인 노력 이외에도 현지 주민들의 의기투합 역시 자연을 지켜낸 또다른 원동력이었다. 주민들은 자신들과 야생동물의 터전을 함께 지켜내기 위해 지난 1988년 기금을 모아 ‘시레토코 재단’을 설립했고, ‘1인 100㎡ 숲 살리기’와 ‘한 구좌 8000엔 기부 운동’을 꾸준하게 추진해 왔다.
현재까지 6만 여명의 주민 참여로 5억엔(약 50억원)의 예산이 확보됐고, 재단은 줄곧 국립공원 내 사유지를 매입해 개발 열풍으로부터 환경 자원을 지켜냈다. 이런 성과는 세계적으로도 ‘내셔널트러스트(National Trust·자발적인 시민성금으로 보전가치가 큰 자연자산이나 문화유산을 매입해 영구적으로 보전하고 관리하는 운동)’의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남아있다.
테라야마 겐(寺山元) 재단 사무국 차장은 자연의 미래에 대한 꿈과 시민정신을 강조하며 “주민들의 자발적인 노력을 바탕으로 특히 80년대 후반 일본 경제 고도성장기의 개발압력을 최소화시킬 수 있는 명분이 마련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현재 40여명의 상근직원이 근무 중인 재단은 체계적인 생태계 조사와 지역 주민들의 안전 확보, 고품질의 맞춤형 친환경 탐방 서비스 제공에도 적극적이다. 재단은 설립 초기 생태조사의 모집단이 될 불곰 개체들을 포획한 뒤 위치추적장치를 달아 야생 불곰의 동태와 활동반경 등을 파악했고, 개체수 증가에 따른 효과적 관찰을 위해 10년 전부터는 위성항법장치(GPS)를 생태 모니터링에 도입하기도 했다.
실질적인 주민 안전 확보를 위해 마을 인근과 시설물에 불곰의 접근을 막는 전기펜스를 설치·관리하고, 탐방로 길목마다 ‘곰 출몰 주의’를 알리는 안내판을 설치한 것도 재단의 주요 업적 가운데 하나다. 상시 현장 안전점검과 불곰 신고센터 운영, 정기 간행물 발간 등의 업무 역시 재단이 도맡았다. 현지의 생태정보가 총망라된 ‘시레토코 자연센터’를 탐방객들의 필수 방문코스로 만들어낸 것도 재단의 소중한 성과다.

◇ 지속가능한 공존의 교육
민관 합작의 입체적인 노력 이외에도 현지에선 미래세대를 대상으로 공존에 대한 교육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국립공원에 인접한 샤리(斜里)초(町·한국의 면 단위 마을) 우토로(ウトロ) 마을에선 어린이들부터 정기적인 안전교육을 받으며 야생동물과 ‘조화롭게 사는 법’을 배운다.
지난 18일 샤리초 우토로 중학교에서 만난 사이토 나오히코(齋藤直彦) 교무주임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불곰과 마주쳤을 때의 대응 행동요령과 야생동물의 생태적 습성 등을 구체적으로 학습시킨다”면서 “인간에게 위협적인 동물이라도 아는 만큼 함께 살 수 있단 점을 꾸준히 가르친다”고 밝혔다.

◇ 공존, 인간의 도리
태곳적부터 자연에 깃들어 온 본래의 주인들에게 인간은 결코 반갑지 않은 손님이었다. 공존이란 건강한 관계성의 회복은 인간의 시혜라기 보단 역시 자연의 일부인 인간들이 갖춰야 할 본연의 도리에 가깝다. 이는 궁극적으로 사람을 위한 길이기도 하다.
시레토코 국립공원과 인근 마을들을 함께 살펴본 채희영 국립공원연구원 자연자원조사단장은 이곳을 “인간과 야생동물이 이상적으로 공존하는 모습이 우리에게도 지향점을 제시하는 좋은 선례”라고 평가하면서 “야생동물들의 공간을 사람들이 빌려 쓴다는 마음으로 우리도 큰 틀에서 공존의 이상적인 공식을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토로 마을에서 만난 농부 이와타씨의 미소는 공존의 이상을 현실로 만드는 단초를 보여줬다. 기르던 작물들이 불곰으로부터 피해를 본 경험이 있다는 그에게 혹시 화가 나지는 않았는지 묻자 촌로는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불곰은 친구와도 같은 존재입니다.”

샤리(일본)=사진·글 구성찬 기자
[취재협조=국립공원관리공단]


[사진설명](위에서부터 순서대로)
-일본 홋카이도 시레토코 국립공원 해안가에서 어미 불곰을 따라 새끼들이 나들이에 나섰다. 본격적인 홋카이도 개척 이후 한때 자취를 감출 뻔했으나 현재 이곳 국립공원에 300여 마리가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수컷 에조사슴(홋카이도 꽃사슴) 두 마리가 뿔싸움을 하고 있다. 순한 초식동물이지만 야생 사슴들은 겨루기를 하는 순간 매서운 눈빛을 뿜어낸다.
-햇살을 머금은 갈까마귀가 힘찬 날갯짓을 하고 있다.
-흰꼬리수리가 해안가를 날아가고 있다.
-탐방객들이 보트에 올라 국립공원 해안가의 야생동물들을 조망하고 있다. 생태관광 가이드라인에 충실한 ‘착한’ 방문객들의 증가는 지역경제에도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곱사연어 떼가 산란을 위해 오호츠크해의 거친 파도를 거슬러 하천으로 돌아오는 모습. 연어는 동면을 준비하는 불곰의 좋은 먹잇감이 된다.
-‘1인 100㎡ 숲 살리기’ 운동에 참여한 기부자들의 명패가 시레토코 재단의 기념관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국립공원의 원시림 너머로 무지개가 떠 있다.
-국립공원 내 명승지 중 하나인 시레토코 오호(五湖) 제1호수 주변에는 탐방객들의 안전과 편의를 고려한 3m 높이의 생태 고가목도와 전망대가 설치돼 있다. 야생동물이 우선인 이곳에서 사람들의 발길을 최소화하고, 동물들의 생활을 방해하지 않도록 설계됐다. 현지 지방자치단체는 8억엔(약 80억원)을 들여 길이 800m의 친환경 탐방로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