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가방 여섯개… 꿈도 여섯 빛깔

입력 2014-08-22 16:15

올해 87세. 공부와 사랑에 빠진 할머니가 계십니다. 직접 소개를 부탁드렸더니, 이름 석자로 삼행시를 지으셨습니다. “(이)사람 이름이 (영)복이여유~. (복) 많은 이름이라고들 해유~.”

이영복 할머니의 재치있는 답변에 빵 터졌습니다. 충남 서천군 서천읍이 고향인 할머니는 이 지역 유명 인사십니다. 78세에 처음 한글 공부를 시작, 81세에 초등학교 인정 검정고시에서 합격하셨습니다. 2014년 한국문해교육협회 주관 체험수기 공모전에서 최우수상 수상, 최근엔 ‘할매의 봄날’(책미래)이란 책도 출간했습니다. 지난해에는 1억원 상당의 토지를 서천군에 기부, 남편 이름을 딴 ‘김영희 쉼터’도 조성했습니다.

할머니는 세상에서 공부가 최고로 재밌으시데요. “젊을 때는 가난혀서 먹고사니라 바빴고, 중간에는 애덜 핵교 보내고 서울 왔다갔다 하니라 바빴어유. 남편이 아파 병원 댕기느라 바빴고, 지금은 어려서 못한 공부하니라 바뻐유.” 매일 배움터로 향하는 할머니를 지난 18일 서천읍 군사리 봄의마을 종합교육센터에서 뵈었습니다. 할머니는 성인문해교실에서 친구분들과 ‘열공’중이셨습니다.

할머니의 ‘여섯 개 가방’

‘①절인다, 절였다. ②저린다, 저렸다.’ 칠판에 써있던 말들입니다. 이날 학습 목표는 ‘소리가 같지만 뜻이 다른 말 알기.’

“어머니~, 글자 모양과 뜻이 어떻게 다른지 아셨죠? 소금에 절인다, 다리가 저린다. 그럼 문장을 읽고 거기 맞는 곳에 동그라미를 쳐보세요.”

머리 희끗희끗한 할머니들이 이희정(53) 선생님의 말을 귀담아 듣고, 읽고 쓰고 지우기를 반복. 마침내 답 맞추는 시간입니다. 가운데 맨 앞줄에 앉으신 이 할머니의 답안을 확인해 볼까요?

‘요즈음 혈액 순환이 잘 안 되는지 자주 다리가 (절인다, 저린다O).’ ‘오이를 식초에 (절였다O, 저렸다).’ 다행히 다 맞추셨네요. 선생님은 “평균 70대 중반의 어머니 22명이 공부한다”며 “이영복 어머니가 제일 어른이신데 학구열이 가장 높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수업에 빠진 적이 없으시데요.

2시간 수업을 마친 할머니는 감색 체크무늬 ‘책가방’을 들고 사뿐사뿐 걸으셨습니다. 종합교육센터에서 할머니 집까진 5분 거리. 파란색 대문의 2층 집입니다. 할머니는 1층에서 혼자 살고 계십니다.

할머니 공부방이 궁금했습니다. 책상으로 보이는 작은 상 위에 정성들여 쓴 성경 구절이 있었습니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

이 말씀을 특히 좋아하신데요. “근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데유. 그런데 어디가서 기쁜 맴을 가져오면 웃음이 나유. 아무 것도 없는 거 같지만 노력혀서 돈 벌면 부유해져유. 지금 당장 암 것도 없는 빈털터리 같지만,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건강이 있잖유. 다 마음먹기에 달렸어유.”

상 옆에 놓인 4칸짜리 책장엔 교과서, 책, 노트들이 꽂혀 있었습니다. 할머니 키 높이의 맨 위 칸엔 가방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습니다. 서로 다른 모양을 한 여섯 개의 가방. 비싸고 멋진 가방이 아닙니다. 장바구니용은 더더욱 아니고요. 문득 이들 가방의 정체가 궁금했습니다.

“그날그날 아침마다 내가 들고 나가는 거여유. 이 넘은 월요일 한글반 가방, 저건 교회 들고 가는 성경가방….”

할머니는 매일 다른 가방을 들고 다니신데요. 월·화요일은 성인문해교실 한글반 가방, 수요일은 노인대학 가방, 목요일은 보건소 가방, 금요일은 조금 널찍한 한글반 가방, 주일에 드는 성경가방.

“딸이 사준 성경가방이 젤로 비싸구만유. 금요일 드는 가방은 그림도구 등 준비물 넣으라고 한글반에서 널찍한 걸로다가 선물로 주셨슈. 나머지는 지가 다 장만한거유. 젤로다 작은 깜장 가방은 암디나 들고댕길라고 샀슈.”

멋지고 바쁘게 사는 할머니는 건강해 보였습니다. “사실 귀도 어둡고 오른쪽 눈이 보이지 않는 3급 장애인이유. 젊어서 중이염을 앓았는디 치료시기를 놓쳐 보청기를 껴도 잘 못들어유. 한글반 수업 때 맨 앞에 앉아야 선상님 입을 볼 수 있잖어유. 다 알아듣지는 못혀유. 그려서 나가 참 바보가 된 거 같어유. 근디 바로 맴을 바꿔봐유. 나보다 더한 장애인들이 얼마나 많어유. 이렇게 먹고 잘 걷고 볼 수 있는 것만도 감사허쥬.”

할머니의 ‘오랜 겨울’

집안 살림이 어려웠던 할머니는 ‘입 하나라도 줄이자’며 17세에 결혼했습니다. 21세의 남편(김영희·2010년 작고)은 가난한 양복 기술자였습니다. “끼리끼리 하잖유. 울 집이 가난혀니께 시집도 가난혔슈. 물동이 일 줄도, 방아를 찧어본 적도 없는디 몸이 불편하신 시아버님을 모시고 여서 어찌 사나, 울기도 참 많이 울었슈. 그려도 죽으란 법은 없데유.”

할머니는 시집온 지 열흘 만에 닥치는대로 남의 집 일을 하고 쌀을 구했습니다. 나무가 없어 산으로 나무를 하러 다녔습니다. 일하느라 손톱이 하도 닳아 손톱을 깎아본 적이 없으시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아끼며 산 덕분에 시집온지 4년 만에 555평 논을 갖게 되셨데요. 남편 명의의 땅 문서를 받아든 순간, 감격에 겨워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하셨답니다. 당시 동네 어르신들이 그 땅을 ‘백쪽 치매 논’이라고 불렀답니다.

“치매(치마)를 여러군데 기워입었구만유. 나중에는 하도 덧대서 치매가 무겁더라구유. 그렇게 일해서 산 땅이라 ‘백쪽 치매 논’이라고 불러주셨슈.” 몇 년 후 그 땅을 팔고 더 넓은 917평을 구입했습니다. 나중에는 할머니네 논이 2만6000평이나 되었답니다.

할머니는 오로지 자식들 때문에 열심히 일했습니다. 내리 딸 넷을 낳고 아들 셋을 낳으신 할머니. 둘째 딸은 오래 전에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셨데요. “우리 부부는 사치하고 이러는 거 생각두 안하고 살았슈. 자식들 가난하게 살게 하지 말자, 무식을 물려줘서는 안된다는 신념으로 살았지유. 그려서 다 서울서 공부시켰어유. 의사, 박사, 사업가로 다 잘됐구먼유.”


할머니의 ‘봄날’

돌이켜보면 힘들었던 시절, 할머니는 신앙의 힘으로 모든 것을 이겨냈습니다. 할머니는 여섯 살 때 언니를 따라 처음 교회에 나갔습니다.

“하루는 언니가 그러데유. ‘아부지, 엄니 편찮으시다고 목사님이 저녁때 기도해주러 오신데유.’ 지금 생각해보면 목사님 장로님 권사님들이 쌀이랑 먹을거리를 갖고와 기도해주셨던 거 같어유. 아부지가 나중에 엄니한테 그러시데유. 안식구가 낫거던 애덜 데고 교회 꼭 다니라고유. 엄니가 참말로 열심히 교회를 댕겼슈. 그때 엄니가 딸만 넷 낳고, 아들이 없었는디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하셨슈. ‘하나님 삐둘어져도 괜찮고, 찌그러져도 괜찮으니 이 서방네 대만 잇게 아들 하나 주셔유.’ 44세에 기적적으로 아들을 나셨는디, 이짝 옆 머리가 삐뚤어졌슈.”(웃음)

그러나 할머니는 결혼하면서 교회를 다니지 못했습니다. 남편의 반대가 심했기 때문입니다. 오랜 세월 교회를 잊고 살던 할머니가 60세 때 친정어머니를 여의고 다시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내가 엄니 임종을 못 지킨 불효자여유. 엄니는 ‘영복아, 교회에 꼭 나가거라. 그래야 우리가 나중에 천국에서 만나지’라고 말씀하셨는데, 내내 마음에 걸렸슈. 엄니에 대한 죄송함 때문인지, 남편이 화를 내도 무섭지 않더라구유.”

다시 나간 서천교회(김대곤 목사)는 1901년 설립된, 서천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입니다. “나랑 주일핵교 같이 댕겼던 분들 두 분이 계셔유. 감격스럽지유. 5년 전까지 식사당번도 안 빠지고 다 했슈. 내가 지금 권사님이유.”

할머니의 87번째 여름나기

2005년 5월, 할머니는 솔깃한 소리를 듣습니다. “배움터서 한글을 가르켜준다는 거예유. 지 나이가 걸리잖유. 상관없데유. 처음 가보니 60대만 20명 앉았고, 나처럼 늙은이는 없드라구유. 이름 석자 쓸만큼만 밸라 혔는디, 백일장도 나가보고. 영복이 출세했구만유.”

당시 할머니는 일주일에 네 번 서천군자원봉사센터 늘푸른 배움터에 다녔습니다. 위기도 있었습니다. 공부를 시작한 지 한달 만에 남편이 아프셨던 겁니다. 서울 가서 두 번 수술하고 남편이 회복하는 시간을 거쳐 10개월 만에 다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침대서만 누워지내는 남편을 돌보면서도 할머니는 3년 만에 초등 과정을 마치고 2008년 6월 초등검정고시에서 당당히 합격하셨습니다. 그해 8월 배움터 졸업식 때 여섯 자녀들이 100만원씩 모아 축하금을 할머니에게 건넸습니다. 할머니는 그 돈으로 의미있는 일을 하고 싶다며, 큰 딸이 졸업한 서천여고에 600만원 장학금을 전달했습니다.

영어 때문에 중등검정고시를 포기한 게 아쉬울 뿐, 할머니의 공부는 계속 됐습니다. 한번은 선생님이 시를 써보라고 하셨데요. “선상님, 시가 뭐래유?” 질문하는 할머니에게 선생님은 “행복에 대해 짧은 느낌을 써보라”고 하셨답니다. 그때 쓴 ‘행복’을 소개합니다.

“행복이란/내게 주어지는 대로/받아들이는 것이다./어디서 빌릴 수도 없고/살 수도 없다./남한테 추한 모습 보이지 않고/자식들에게 짐 되지 않으면 행복이 아닌가./멀리 있는 행복만 쫓아가지 말고/가까이 있는 행복을 눈 여겨 보자./지금 내가 느끼는 이 행복이/항상 내 맘 속에 머물고 있기를/간절히 기도해본다.”

이렇게 행복했던 할머니. 잠시 그 좋아하는 공부를 접으려고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2010년 66년을 해로한 남편을 먼저 보내고, 2년 뒤 금쪽같은 장남을 사고로 잃었을 때 할머니는 다 포기하려고 했습니다.

“공부고 뭐고 다 접을라고 했슈. ‘하나님 내가 왜 이런 아픔을 당해야 혀유’라며 낙서하고 그걸 찢어 내비리고. 그란디 어느 날, ‘내가 이런다고 얘가 살아서 돌아오나. 다시 공부를 혀자’란 생각이 들었어유. 당하면 당하는대로 잘 소화시키는 게 사람인거 같어유.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 맹그러주셨어유.” 할머니에게 글 쓰기는 치유입니다.

할머니는 주변 어르신들에게 배움을 권면합니다. “배워야 뭣혀. 머리로 들어가는 게 있어야지”라고 반응하시는 분들에게 “열 자를 배면 두 자씩은 들어유. 그 두 자를 계속 모아봐유. 일루(머리) 하나 꽉 차지. 그런 맴으로 한번 공부해봐유”라고 말씀하신데요.

할머니는 새 목표와 함께 여든 일곱 번째 여름을 보내고 계십니다. “그동안 글 쓰러 많이 댕겼잖유. 그려서 성경을 못 읽었슈. 신구약 2000장쯤 되는데, 5월부터 시작혀서 1200장 정도 읽었슈. 올해 안에 다 읽으려면 바뻐유. 다 못 읽을까봐 걱정이 좀 되유.”

이영복 할머니, 꼭 성경 일독 목표 이루세요. 그리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서천=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