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은 대단한 사람이었다. 거구 골리앗을 물맷돌로 쓰러뜨렸다는 점도 대단한 일이지만, 그보다도 훨씬 더 위대했던 것은 그의 용서였다.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게 된 바 있다. 자신이 숨어있던 굴속에 사울 왕이 홀로 들어오게 됐을 때, 다윗의 부하들은 이 때야 말로 하나님이 주신 복수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았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마 5장 44절)을 다윗은 이미 실천하고 있었다. 이것이 다윗의 위대한 점이었다.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고 그저 그의 옷자락만 베었다. 하지만 다윗은 그 옷자락을 베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찔렸다.(삼상 24장 5절) 실제적으로 살인을 해야만 살인죄를 짓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미워하는 것도 이미 살인의 죄가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마 5장 21~22절)을 다윗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야말로 다윗은 위대한 신앙인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그런 다윗이 나발이라는 사람을 향해서는 분노를 그치지 않았고 그를 죽이기 위해서 400명의 용사들을 무장시키고 출정을 했다. 다윗과 그 일행이 보호해주며 많은 도움을 주었던 나발에게 양털을 깎는 축제의 날에 음식을 얻으러 보냈으나, 나발이 이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다윗을 모독하는 발언을 했기 때문이었다. 나발이 다윗을 비난하고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다윗은 분노하며 나발을 죽이기 위해 용사들을 무장시킨 것이다.
왜 다윗은 사울 왕에 대해서는 용서할 수 있었으면서, 나발에 대해서는 용서할 수 없었을까? 기대가 큰 만큼 실망과 분노가 더 컸기 때문일까? 부하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며 함께 잔치를 즐기려고 하다가 그것이 수포로 돌아가 실망하는 부하들을 보았기 때문일까? 사울 왕을 향해서는 놀라운 용서를 할 수 있었던 그가 왜 나발에 대해서만큼은 그 분을 삭이지 못했을까?
사실 이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그게 인간이다. 한 없이 마음이 넓고 어진 사람이 항상 어질 수만은 없는 게 사람이고, 책임감 있고 성실하던 사람이 갑작스레 이상한 행동을 보일 수 있는 게 사람이다. 지킬 박사처럼 존경을 받는 사람이 밤중에 하이드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은 언제든지 괴물이 될 가능성이 있다.
뉴스와 소식이 발달한 이 시대에 우리는 다른 어떤 때보다 암울하고 절망적인 소식들을 많이 접하게 된다. 아주 유명한 기독교 대학의 모 교수가 비행기 안에서 성추행을 하다가 FBI에 체포됐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복음을 위해 헌신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쳤던 사람의 추한 행동이 발각됐다는 소식이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그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에겐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가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우리의 절망적인 모습 때문이다. 우리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완벽하게 죄에 대한 면역성을 가질 수 없다. 아무리 수도(修道)를 많이 한다 해도 약간의 진전은 있을 수 있겠지만 완벽한 사람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언제든지 괴물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전적으로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갈구해야 하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시고 악에서부터 구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선줄로 생각하면 넘어지기 쉽기 때문이다.(고전 10장 12절)
<목회자 칼럼>대구남부교회 이국진 목사 “사람은 언제든지 괴물이 될 수 있다”
입력 2014-08-20 1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