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브로브니크 좌충우돌 배낭여행기] ‘꽃누나’의 스토리텔링 파워

입력 2014-08-08 17:36 수정 2014-08-08 19:58
스르지산 정상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드브로브니크 고성 시가지 전경.
드브로브니크 구시가지 중심가인 플라차광장은 유럽각국에서 온 관광들로 북적인다.
‘꽃보다 누나’ 촬영지마다 부쩍이는 한국인들

“꽃보다 누나~ 이승기~”

지난 7월 28일 오전. 두브로브니크 구도시(Old City) 성벽 위 둘레길에서 만난 20대 초반 크로아티아 처녀는 유창한 한국말로 일행을 유혹했다. 섭씨 33도가 넘는 뜨거운 태양 아래 지상 25m 높이의 성곽 둘레길에서 땀 뻘뻘 흘리며 걷는 동양인들이 한둘이 아닐진대 곧바로 우리를 알아보더니 한국말로 말을 섞었다. 요즘은 서양인들도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을 곧잘 구분한다더니 이 처녀는 한국인임을 단번에 알아보고 자신의 카페로 오라고 손짓했다.

아닌게 아니라 아드리아해(海) 고도(古都) 두브로브니크엔 지금 한국인들로 넘쳐난다. 최대 관광지인 성벽안 구시가가 아니더라도 여기저기 한국인들이 부쩍인다. 버스를 타도, 항구를 가도, 카페를 가도 한국인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한국에서 오셨냐’는 반가움보다는 되도록 안 부딛쳤으면 하는 바램이 앞서니 서로 눈길부터 돌리기 일쑤다. 이제 ‘한국도 먹고 살만해졌나보다’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데 일본인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관광객 수가 국력을 나타낸다더니 막 내린 영화관을 빠져나오듯 밀려 오가는 외국인 관광객들 사이로 일본인들을 좀처럼 만나기 어렵다. 어쩌다 만나면 ‘곤이찌와! 사요나라’라는 일본식 인사를 하면 그들은 무척 반겼다. 한국인이 아닌 동양인 관광객이다 싶으면 영락없이 모두 중국인들이다. 중국인들은 역시 어딜 가나 무척 시끄럽다. 떼로 몰려다니는 모습에서 10~20년전 우리들의 자화상을 떠올렸다.

두브로브니크 사람들은 지난해 11월 국내에 방송된 tvN의 배낭여행 다큐 <꽃보다 누나>(연출 나영석)를 기억하고 있다. 구시가에선 <꽃누나> 촬영지나 주인공 이름을 많이들 기억한다. <꽃누나>편을 인터넷으로 본 사람들도 많다. 결과적으로 tvN이 두브로브니크 홍보대사역을 톡톡히 해준 셈이다.

최대 관광명소된 부자카페…느림과 멈춤, 되돌아봄, 사색과 반추

철옹성 같은 2km 성곽 둘레를 돌다보면 ‘지상낙원이 바로 여기’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푸른 코발트빛 아드리아해에 떠있는 주황색 지붕과 베이지색 돌담벽은 보는 이들의 탄성을 자아낸다. <꽃누나>의 출연자들이 거쳐간 곳은 한국인들에게 모두 빼놓을수 없는 관광명소가 됐다.

오후 3시. 갑자기 요란한 천둥소리와 함께 폭우가 쏟아졌다. 내 눈에도 한국 사람인 듯한 여학생 역시 단번에 나를 알아보고 ‘저 부자카페가 어디예요?’라고 묻는다. 폭우로 옷이 다 젖어도 부자카페만은 꼭 가야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느껴졌다.

부자카페는 높은 성벽 안길 중간지점에 성인 한사람이 간신히 지나갈 정도 작은 틈새길을 통해 바다 쪽으로 가야만 접근할 수 있는 암벽카페다. 이 카페는 한국인들에게 언뜻 돈 많은 부자(富者)를 떠올리게 하지만 크로아티아어 말로 ‘구멍’을 뜻하는 ‘부자’(BUZA)다.

지난해 11월 29일부터 올해 1월 22일까지 방송된 <꽃누나>에서 짐꾼 이승기와 윤여정, 김자옥, 김희애, 이미연 등 여배우들이 코발트빛 해안 카페절경에 매료되어 탄성을 질렀던 곳으로 국내 시청자들에게 잘 알려졌다.

부자카페는 흘러간 팝송을 주로 들려준다. 그러니 한국관광객들의 향수를 언제나 자극한다. 한 병에 30~40쿠나(크로아티아 화폐단위. 10쿠나는 약 한화 2000원 정도)하는 레몬맥주를 마시면 아드리아 낭만에 다들 젖어든다. 곳곳에서 ‘이곳이 이승기 김희애가 마셨던 자리’라고 수군대며 <꽃누나>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다.

<꽃누나>가 ‘인생=여행’의 스토리텔링 녹여내

<꽃누나>가 첫 방송된 지난해 11월말 이후 이곳에 한국관광객들의 발길이 부쩍 잦아졌다. 숨 막히며 짜증나는 현실을 떠나온 듯 ‘이곳을 떠나기 싫다’고 농담을 던졌다. 지난 2012년 6월 23일 KBS 1TV의 여행다큐 <걸어서 세계속으로>가 ‘풍경보다 아름다운 블루 : 크로아티아’편에서 두브로브니크를 소개했고, 지난 2012년~ 2014년 EBS의 <세계테마기행>도 ‘아드리아의 주인 크로아티아’편 등에서 역시 이곳을 자세히 방송한 바 있다. 국내에 두브로브니크가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꽃누나>가 방송된 지난해 말부터라고 한다.

이렇게 국내 방송사들의 이목을 끌었던 두브로브니크는 아드리아해(海)에 인접한 해안에 있는 작은 성벽도시이자 술탄의 이슬람의 침입에 대비해 축성한 견고한 일종의 요새다. 7세기 이탈리아 베니스에 맞먹는 도시국가로 성장했고 교황은 물론 유럽의 부호들의 휴양지로 각광을 받으며 무역 해상 과학의 요람으로 한때 부상했다. ‘제2의 베니스’로 한때 통했던 이것은 지금 요트와 카약, 스킨스쿠버, 유람선, 민속공연 등 편의위락시설이 잘 갖춰져 유럽인들에게 최고의 여름휴가지로 손꼽히고 있다.

필레게이트에서 미로 같은 길을 따라 성곽안으로 들어서면 오노프리오스 분수대가 보이고 이내 플라차 중앙로가 나타난다. 수많은 레스토랑과 카페, 상점들이 즐비하고 골목마다 노천 레스토랑에서 관광객들을 호객한다. 공항에서 한시간 거리를 아틀라스(Atlas) 공항버스를 타고 오던 피곤함이 사라지는 순간들이다.

부언하면 두브로브니크 버스 기사들은 대단했다. 운전하며 요금도 받고 거슬러 주기도 한다. 공항버스는 편도 35쿠나, 시내버스는 8쿠나를 받는다. 시내버스는 티켓을 끊지 않으면 10쿠나 현금을 받고 돈통에서 거스름돈도 돌려준다. ‘빨리빨리’에 익숙해진 한국인들이라면 소란이 날 텐데 여기에선 시간이 멈춘 듯 다들 기다리는 한마디로 ‘만만디’다.

구시가 80%가 파괴된 전화… 평화 소중함을 일깨운 전쟁박물관

그러한 두브로브니크에 독립전쟁의 아픈 상흔은 곳곳에 남아있다. 깨진 주황색 기와와 화염에 그을은 벽돌, 폐허로 방치된 집터들이 구시가지 안 골목 곳곳에 남아있다. 대피소로 이용되었던 구시가 전쟁박물관에는 당시 참상을 증언하는 흑백사진들이 빼곡히 전시되어 관광객들에게 당시 참상을 알리고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1945년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되었던 크로아티아는 1991년 크로아티아 분리독립 선언 후 세르비아 중심의 유고연방군의 공격을 받아 구도시 건물 80%가 피해를 입었다. 종전한 1995년 이후 유네스코 지원을 받아 구도시 복원에 들어가서 이젠 옛 명성을 되찾을 만큼 아름다운 해안 도시로 거듭났다. 반질반질하게 닳아버린 돌길을 걸으면 찰나의 시간들에 얽매인 우리들을 되돌아보게 된다.

두브로브니크를 굽어보는 스르지산 정상에도 전쟁 희생자를 기리는 대형 십자가가 우뚝 서있다. 구시가지에서 나와 300m 올라가면 산 정상을 오르내리는 케이블카가 있다. 왕복요금 100쿠나를 내면 약 10분여간 두브로브니크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가 있다. 이곳에서 두브로브니크가 ‘아드리아의 진주’ ‘유럽속의 아주 특별한 유럽’으로 알려진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된다.

지난해 <꽃보다 할배>로 시작된 <꽃보다> 시리즈는 유럽에 대한 한국인들의 관심을 더욱 촉발시켰다. 크로아티아 도시 중에서도 두브로브니크는 삶에 지친 한국인들에게 휴식을 주는 휴양지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꽃보다>시리즈가 케이블임에도 시청률 9.64%(케이블 전국단위 닐슨 기준)를 기록한 것도 남다른 이유가 있다. 단순히 관광만이 아닌 배낭여행이란 포맷을 통해 ‘쫓기듯 살아온 시간들’을 저마다 뒤돌아 보며 반추하는 ‘라이프 스토리텔링’을 테마로 하여 시청자 공감을 이끌어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버나드 쇼 “지상에서 천국을 찾으려거든 두보르브니크를 가라”

두브로브니크에선 누구나 사색에 빠지나 보다. 19세기 영국의 최고 극작가이자 소설가, 비평가인 버나드 쇼(Shaw. George Bernard)는 ‘I knew if I stayed around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라는 명언을 남겼다. 국내에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고 잘못 해석된 채 알려진 버나드 쇼가 남긴 자신의 묘비명이다. ‘오래 살다보니 이런 일(죽음)이 생길 줄 알았다’고 번역하는 게 원의에 더 가깝다. 누구나 죽음을 생각하지만 막상 눈앞의 현실로 닥치면 이내 당황하며 지난 시간들을 후회할 것이란 점을 되짚어보게 만든다.

버나드 쇼 역시 생전에 ‘지상에서 천국을 찾으려거든 두브로브니크로 가라’고 했다고 한다. 프랑스 소설가 빅토르 위고도 자주 찾았다는 두브로브니크 이곳에서 버나드 쇼 역시 자신의 인생역정을 반추하며 묘비명을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비난 버나드 쇼 뿐 아니라 두브로브니크에는 이방인들에게 자신의 삶을 사색하고 반추하게 만드는 묘한 힘이 있다.

<꽃보다~> 시리즈는 ‘인생=여행’이란 등식의 스토리텔링이 있다. 톱 여배우로서 인생역정을 거쳐 온 윤여정과 김자옥, 이미연의 고백 내레이션은 자신들의 인생의 되돌아봄을 말한다. 그들의 독백이 프로그램 곳곳에 녹아들면서 시청자들 가슴의 공감대를 넓혔던 것 같다.

이제 다큐물에도 스토리텔링이 스며들 필요가 있다. 두브로브니크에서 <꽃누나>는 한국의 문화상징으로 각인되어가고 있다. 스토리텔링이 녹아든 이같은 TV방송물들이 한국과 우리문화를 세계에 가장 잘 알릴 수 있는 최고의 문화콘텐츠다.

뜻밖에 찾은 3박 4일간 두브로브니크 배낭여행. 그곳에서 모처럼 느림과 멈춤, 되돌아봄, 사색과 반추, 풀림을 가슴 깊히 느낀다. 아울러 우리방송의 글로벌 파워를 다시 실감하면서.

두브로브니크(크로아티아) =김경호 방송문화비평가 kyungh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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