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픽션 물모지인 한국에선 드문 작가였다. 20대에 이미 ‘거꾸로 읽는 세계사’라는 전국민 필독서를 만들어냈다. 상업적으로 성공한 작가였지만, 스스로 ‘실패한 정치인’이라 칭하는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나의 한국현대사’란 새 책을 들고 나왔다. 직업으로써 정치를 그만두고 원래 직업인 문필가로 복귀한 유 전 장관에 대해 정관용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얼굴이 좋아졌다”고 덕담했다.
전직 장관이라고 부르지 말아달라는 유 작가는 젊은 세대에겐 역사 공부를, 그리고 고령 세대엔 귀를 열어 달라고 했다. 왜 현대사인가. 그는 2012년 대선에서 극명하게 갈린 세대별 표 결집 양상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간다.
유 작가는 7일 CBS 라디오 정관용 교수가 진행하는 시사자키에 출연했다. 유 작가는 책을 빨리 쓴다는 말을 듣고 “꼭 1년에 한 권씩 내야 먹고 살아요”라고 답했다. 전업으로 글을 쓰는 사람은 그 정도는 써야 한다고 했다. 비법으로는 “월급받는 데가 없으면 빨리 쓰죠”라고 답했다. 정 교수는 이에 대해 “생계형 저술가의 솔직한 얘기로군요”라고 화답했다.
유 작가가 들고온 책 제목은 ‘나의 한국현대사’, 부제는 ‘1959~2014, 55년의 기록’이다. 유 작가 스스로 59년생 돼지띠다. 그는 “제가 살아온 세월만 한 번 정리를 해 봤다”라며 “관찰자로써 연구자로써 썼다기보다, 그 안에 있으면서 계속 번민하고 고민하는 그런 시민으로써” 썼다고 했다.
책을 쓴 동기는 역시 정치다. 그는 “지난번 대선 끝나고 나서 세대별 지지 성향이 너무나 극명하게 갈렸다”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 현대사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감정 판단 이런 것들을 한 번 짚어봐야 되겠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이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들에 대한 평가, 또는 그 사실에서 느끼는 감정, 이런 것들을 좀 교류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덧붙였다.
돌베개가 펴낸 책의 띠지는 ‘프티부르주아 리버럴의 위험한 현대사 읽기’라고 쓰여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프티부르주아’와 ‘리버럴’에 대한 학술적 이해가 필요하다. 유 작가는 프티부르주아에 대해 “소자산 계급을 이야기한다”라며 “남을 고용해서 부려먹고 이런 건 아니지만, 자기도 뭘 좀 갖고 있으면서 자기 힘으로 살아 나가는 계층”이라고 했다. 또 리버럴을 두고는 “내 인생 내가 사니까 내가 남을 부당하게 괴롭히지 않는 한 남들도 또는 국가도 나한테 간섭하지 마세요. 나는 내 인생 살고 싶은 대로 살 거에요. 대개 이런 지향”이라고 했다.
보다 자세하게 이해하기 위해선 유 작가가 책에 쓴 프로필을 읽어 볼 필요가 있다. 유 작가는 “역사서를 볼 때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고 그 책을 읽는 게 좋다는 뜻”이라며 “커밍아웃을 미리 해 놓은 거”라고 말했다. 이하 유시민이 말하는 ‘유시민’이다.
1959년 7월 하순 경상북도 경주시 북부동 낡은 기와집에서 태어났다. 눈을 뜨고 보니 누나 셋과 형이 벌써 자리를 잡고 있었다. 2년 뒤 막내인 여동생이 뒤따라왔다. 어릴 적 밥상머리에서 아버지에게 이순신, 김유신, 제갈공명, 나폴레옹 등 뛰어난 역사 인물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나는 걸출한 개인을 흠모하는 성향이 있다. 스스로 계획을 세워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좋아한다. 남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도, 남에게 무언가를 시키는 것도 왠지 편하지 않다. 돈이나 권력보다는 지성과 지식을 가진 이를 우러러보며 내가 남을 부당하게 해치지 않는 한, 사회든 국가든 그 누구든 내 자유를 침해하지 않아야 한다고 믿는다. 고등학생 시절 출세라는 것을 하려고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간 후에는 공부보다 정부와 싸우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썼다. 야학에서 같은 연배의 노동자들을 가르쳤으며, 학생회 임원을 맡았다가 감옥 구경을 하기도 했다. 스물여섯 살 이후에는 주로 글 쓰는 일로 밥벌이를 했으며, 30대 중반에 독일로 유학을 가서 경제학을 더 공부했다. 40대에는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다가 정치에 입문해 국회의원과 보건복지부장관으로 잠시 공직사회를 경험했다. “프티부르주아 계층의 대구·경북 출신 지식 엘리트로서 젊은 나이에 이름을 알리고 출세를 했지만 결국 정치에 실패한 후 문필업으로 돌아온 자유주의자.” 나는 나를 그렇게 규정한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부족한 덕목으로 꼽히는 ‘공감’, 정치적으로는 세대별 전쟁 수준까지 갈라진 상황에 대해 유 작가는 싸우지 말고 현실 직시부터 해보자고 한다. 모든 역사엔 빛과 어둠이 있다면서. 그는 자신과 정치적 지향이 다른 윗세대에 대해 “성취감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며 “뭔가 이룬 것이 많이 있는 세대임을 인정해야 된다”고 했다.
유 작가는 그렇다고 “산업화를 이룬 고령 세대 시민들이 자아도취적 역사인식을 가지고 있다고 보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다만, 그분들이 자기가 살아왔던 시대에 대해서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정치적으로 보수로 쏠리는 현상에 대해선 “이전 세대가 겪어왔던 역사에 대해서 부정적인 면을 너무 많이 얘기를 하면 단순히 현대사회에 대한 평가를 넘어서서 내가 살아온 시대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나의 삶을 공격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가 있다”라고 했다. 즉, “나의 삶을 긍정하고 싶어하는 소망, 이런 것들이 지금 정치적으로 보면 보수 세력에 대한 지지로 아주 강고하게 나타나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유 작가는 남북관계에 대해 북은 거짓혁명과 남은 거짓공포에 사로잡혀있다고 했다. 북한은 사회주의 혁명 없이 왕조 세습이 이어지고 있고, 남한은 북한과 경제력 격차가 큼에도 과장된 안보 위협으로 인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또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선 “옛날 왕으로 치면 좀 안될 말이지만 혼군”이라며 “폭군은 아니지만 혼군”이라고 했다. 혼군(昏君)은 ‘어리석고 정사에 어두운 임금’을 뜻한다. 나아지려면 “타인의 지혜를 빌려야 한다”고 했는데, 사실 이런 이야기는 그저 유 작가가 짧게 한 것이고, 주목받아야 할 것은 책이다.
책에서 유 작가는 자신의 눈으로 역대 정권을 평가했다. 출판사 돌베개는 서평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국부(國父)를 자처했지만 무능하고 이기적인 ‘폭력가장’이었을 뿐이며, 박정희 대통령은 고결한 인간은 아니었으나 ‘성공한 독재자’였고, 전두환 정권은 불필요한 독재의 연장이었을 뿐”이라고 유 작가가 평했다고 전했다. 또 “노태우 대통령은 가장 평가절하되어 있으나 그의 대북정책만큼은 높이 사야 하며, 김영삼 대통령은 한때 드높은 결기가 빛나던 멋진 시절이 있었고, 김대중 대통령은 공안통치를 하지 않은 최초의 대통령으로서 우리의 민주주의를 한 단계 성숙시킨 인물이며, 노무현 대통령은 스스로 권력의 권위주의를 내려놓은 확고한 민주주의자였다”고 전했다. 이어 “이명박 대통령은 4대강 사업 외에는 말할 거리가 없는 인물로, 박근혜 대통령은 정치·경제·대북정책 모든 면에서 별 기대를 하기 어려운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유 작가는 정권보다 더 대중의 욕망을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무슨 박정희 대통령이나 김대중 대통령이 만든 역사가 아니고, 무엇인가를 갖기를 원하는 대중의 욕망이 한국현대사 60년을 만들어 냈다”고 했다. 또 “그 다음에 개성을 발현하면서 자아실현 하고 싶은데, 문제는 다양한 욕망의 위계체계에서 우리를 지배하는 물질에 대한 욕망, 이것이 너무 압도적으로 크다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유 작가는 “한국사회가 좀더 훌륭한 사회로 발전해 나가려면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욕망을 시민 개개인이 직시해 봐야 한다”라고 했다. 그는 “내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욕망 체계 안에서 타인에 대한 배려 그리고 자유로움, 나의 개성의 발현, 올바른 삶, 이런 것들에 대한 자아실현의 욕구 내지 존중의 욕구, 이런 것들의 우선순위를 좀 앞으로 당겨야한다”고 결론냈다. 이어 “지금처럼 무한 욕망을 충족시키는 방식으로 계속 가서는 한국 사회가 굉장히 어려움을 겪을 거다”라고 전망했다. 한국에선 정권을 교체하는 정치보다 욕망을 제어하는 정치가 더 중요할 수 있다는 성찰이다.
사진=국민일보DB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두 개의 대한민국을 위한 유시민의 이야기, ‘나의 한국현대사’
입력 2014-07-08 18:41 수정 2014-07-09 0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