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전체’(Tota Scriptura)에 따른 바른 구원관을 가르치자

입력 2014-06-19 16:50 수정 2014-06-19 17:03

한국 교회(개신교회)에 대한 일반 국민들의 신임 지수가 매우 낮다. 통계에 따르면 일반 국민들은 로마 가톨릭교회와 불교보다 교회를 더 불신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하여 유병언 일가의 구원파에 대한 언론·방송의 보도가 연일 계속되고 있는 지금, 한국교회가 이단으로 규정한 구원파와 무관하다하더라도, 교회의 신임도는 더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 90년 전 한국교회는 교인 수가 전체 국민의 5%도 되지 않았지만 국민들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받았었는데, 지금은 교인 수가 전체 국민의 20%가 넘는 상황에서 오히려 신임도가 바닥을 치고 있으니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한국교회의 신임도가 왜 그렇게 떨어졌는가? 주된 이유는 한국교회의 윤리성이 국민들의 기대와 눈높이에 미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교회의 윤리성을 고취시켜 신임도를 다시 회복시킬 방안은 무엇인가? 목회자가 설교강단에서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여러 가지 윤리적인 교훈들을 자주 설교하여 교인들의 윤리적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것과, 혹은 신학교 교수가 신학생에게 인성교육과 기독교윤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하나의 대안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신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쳐 온 필자의 소견으로는, 한국교회에 편만하여 있는 잘못된 신학사상과 구원관, 곧 신학을 하나님의 사역으로, 반면에 윤리를 사람의 사역으로 규정하여, 신자의 윤리적인 언행을 기독교신학과 구원의 영역으로부터 제외시키거나 필수적인 사항이 아닌 것처럼 간주하는 잘못을 개선하지 않는 한 근본적인 해결은 어렵다고 본다. 말하자면 교회와 신학교강단에서 기독교윤리가 신학과 복음의 필수적인 부분이며, 예수 믿는 신자라고 할지라도 올바른 삶(윤리)이 없는 자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설교하거나 가르치지 않는 한 한국교회의 윤리성 회복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한국교회의 신임문제는 윤리적인 문제인 동시에 신학적인 문제, 특별히 구원론 문제로 보고 싶다.

어떤 사람들은 이와 같은 필자의 주장을 두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전통적인 기독교구원교리를 부정하고, 행위구원교리를 주창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가 지난 4월 30일자 기독교연합신문에 기고한 ‘한국교회의 구원론은 문제가 없나? - 세월호 사건을 통해 본 한국교회 구원관-’에서 신자의 거룩한 삶(윤리)이 구원의 필수적인 요소임을 강조하자 몇몇 사람들이 인터넷을 통해 행위구원론을 주장하는 것으로 필자를 비난하였다. 필자의 주장을 오해하거나 비난하는 분들을 향해, 구원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과 관련하여 특정한 성경구절이나 부분만을 보지 말고, 성경전체를 두루두루 살펴 볼 것을 부탁드리고 싶다.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만이 아니라, “전체 성경으로”(Tota Scriptura)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은 구원에 관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성경은 여러 곳에서,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율법’, ‘율법의 행위’, 혹은 ‘행위’를 통해서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특히 롬 1:16-17; 3:22,24,28; 4:2-8; 5:1; 갈 2:16; 3:22-24; 엡 2:5,8; 딛 3:5을 보라). 구원은 인간의 노력의 산물이나, 하나님과 인간의 합작품이 아닌,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며,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신 구원을 믿음으로 받는 은혜로운 선물이라는 것이다. 만일 누가 이것을 부정한다면 그는 성경의 가르침을 부정하는 자이며, 인간은 자력구원의 여지가 없는 전적으로 부패한 죄인이라는 사실과, 믿음과 은혜 구원의 토대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을 부정하거나 약화시키는 것이 된다. 종교 개혁자 루터(Luther)와 캘빈(Calvin)이 재발견한 이신칭의와 은혜구원교리는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중요한 교리이기 때문에 이 귀중한 구원교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계속해서 가르쳐지고 보존되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이 어떤 곳에서는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받음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지만, 동시에 다른 어떤 곳에서는 신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신자의 거룩한 삶(윤리)이 구원의 필수적인 요소임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은 로마서 첫 장인 1:6과 마지막 장인 16:26에서 “순종하는 믿음”과, 갈라디아서 5:6에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란 말을 통해, 순종과 사랑(윤리)이 구원 받는 믿음의 필수적인 요소임을 강조한다. 그는 로마서 2:5-10에서 하나님은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 영생(구원)을, 반면에 악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진노의 심판(멸망)이 주어질 것을 강조하면서, 신자의 선행이 최종적인 구원의 필수적인 요소임을 분명히 하였다. 로마서 13:11-14에서 바울은 신자가 구원을 위해 바른 삶을 살 것을 권면하고, 고린도전서 6:9와 갈라디아서 5:21에서는 비윤리적인 행위를 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나라(구원)를 받지 못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12에서 모든 신자는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가야 할 것”을 가르친다. 이와 같은 사도 바울의 가르침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얍 2:24)는 야고보의 가르침은 물론, 마태복음서에 나타나 있는 제자들의 거룩한 삶(의)이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삶보다 더 높지 않는다면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예수님의 산상설교(7:21)와, 25장의 열 처녀 비유, 달란트 비유, 양과 염소의 비유 등에 나타나 있는 제자로 부름을 받았다 할지라도 올바른 선행이 없는 자는 최종적인 구원에서 탈락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일치한다.

이 뿐만이 아니다. 성경은 구원을 설명하는 여러 동사를 사용할 때, 예를 들면 ‘구원하다’, ‘의롭게 되다’, ‘하나님의 나라(천국)에 들어가다’, ‘영생을 얻다’등의 동사를 사용할 때, 과거나 완료형 시제만이 아닌, 또한 현재나 미래 시제를 시용하여, 구원(영생, 의롭게 됨,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감)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이미 이루어진 것인 동시에, 또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신자의 거룩한 삶을 통해 계속 이루어지고, 장차 완성되어질 것임을 가르치고 있다(행 15:11; 롬 5:9-10,21; 고전 15:2; 고후 3:15; 빌 2:12). 특별히 복음서와 바울 서신 등에서 구원을 가리켜, 구약성경에서 구원이 종종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왕의 통치 아래에서 노예생활을 하다가 출애굽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통치 아래로 이전하는 것을 뜻하고 있는 것처럼, 죄와 어두움과 사탄의 집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주권의 이전으로(골 1:13-14), 혹은 속죄를 가져오는 예수님의 죽음과의 연합인 동시에, 또한 새로운 생명과 삶을 가져오는 예수님의 부활과의 연합으로 설명함으로써(롬 4:25; 6:4-5), 신자의 거룩한 삶(윤리)이 최종적인 구원의 필수적인 요소임을 부인할 수 없게 한다. 그럼으로 성경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의 구원을 가르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만을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관으로 이해하여 기독교윤리를 신학에서 제외시키거나 신자의 거룩한 삶을 구원의 필수적인 요소임을 부정하는 것은, 구원에 관한 성경전체의 가르침과는 분명히 어긋나고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신자의 거룩한 삶, 곧 신자의 윤리를 구원의 필수적인 요소로 간주한다고 해서 이를 가리켜 “구원=하나님의 사역 + 인간의 사역”의 등식으로 만들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우리가 신자의 거룩한 삶(윤리)이 인간의 책임임을 아무리 강조한다고 하더라도, 신자에게 있어서 거룩한 삶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노력의 산물이 아닌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사역임을 결코 잊어서는 아니 된다. 바울은 빌립보서 2:12에서 명령법 문장을 통해 구원이 우리의 책임임을 분명히 하지만, 바로 이어 2:13에서 이 모든 것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임을 강조한다. 역시 고린도전서 15:10에서 바울은 자신이 다른 사도들보다 더 많이 수고를 하였다고 고백하지만, 동시에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서 이루신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 윤리는 세속적인 윤리와 달리 성령 하나님의 윤리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기독교윤리는 기독교신학의 부록이나 변두리가 아니라, 필수적인 주류에 속한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가 이점을 분명하게 기억한다면, 아무리 신자의 거룩한 삶을 구원의 필수적인 요소로, 기독교 윤리가 신학의 주류에 속함을 강조한다고 해서 이를 가리켜 행위구원론으로 단정하여 비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처럼 구원문제와 관련하여 성경은 한편으로 믿음으로 은혜로의 구원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신자의 거룩한 삶(윤리)이 없이는 최종적인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탈락될 수 있다는 사실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전자의 구원관에 지나치게 집중하여 왔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값싼 구원관과 함께 신임도의 추락을 안게 되었다. 이제 한국교회는 교회의 신임도를 회복시키기 위해,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세워진 교회의 정체성을 되찾기 위해, 구원에 대한 성경전체의 지지를 받는 바른 구원관을 가르치고 설교하여야 한다. 구원에 대한 성경의 어떤 특정한 가르침이 성경의 다른 부분과 마찰되거나 모순된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어느 한쪽의 가르침을 다른 가르침에 환원시키거나 인위적인 절충을 추구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양자가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제시되고 있는 이상 똑같이 가르치고, 똑같은 강조를 하여야 한다. 성경은 구원은 믿음과 은혜의 선물임을 강조한다. 동시에 거룩한 삶(윤리)이 없이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가르친다.

최갑종(백석대학교 총장, 신약학전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