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아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눈에는 황당한 장면이 보였다. 금송아지를 만들고 바알 신을 섬기는 행위가 벌어진 것이다. 남녀의 음란한 행위와 춤이 어우러진 광란의 축제였다. 노랫소리는 온 사막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모세는 너무나 큰 실망과 분노를 느껴 하나님에게서 받은 십계명 돌판을 금송아지에 던져 부숴버리고 그 백성을 향해 분노를 발산했다.
하나님을 뵐 낯이 없어 실망과 부끄러움으로 몸서리쳤다. “하나님 이 백성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기도와 함께. 그러나 이 죄는 용서될 수 있는 정도를 넘었다.
이때 레위지파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하여 칼을 빼 들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광란했던 모든 무리들을 살육했다. 그 중에는 이웃도, 친척도, 친구도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따지지 않고 행하였다.
그들의 피가 사막에서 도랑을 이루었을 것이다. 그들의 친구, 친척의 울부짖음도 광야를 진동했을 것이다. 그들은 인간적인 동정심을 버리고 슬픔을 참으며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면서 자신의 몸을 던졌다. 그 결과 레위지파는 제사장 지파가 되는 영광을 받았다.
싯딤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또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죄를 짓는다. 이방 신을 섬기는 모압 여인들과 음행하고 그들이 섬기는 신에게 절을 하므로, 하나님께서 진노하사 바알에 절한 자를 죽이시라고 명하셨다.
그 때 이스라엘 자손 한 사람이 미디안 여인을 데리고 왔다. 그러자 비느하스가 창을 들고 남자와 여자의 배를 꿰뚫어 죽이니, 창궐했던 염병이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그쳤다. 이 말씀은 민수기 25장의 기록이다.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바알에게 절하고 하나님을 배반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가혹한 하나님의 분노가 계셨다. 그러나 비느하스의 창은 하나님의 진노를 그치게 하였다. 그리고 그의 후손은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을 받았다.
이 밖에도 예수님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에게 분노하시고 그들에게 강한 질책을 하신 것을 성경에서 볼 수 있다.
지금 우리 교회는 정말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이단이 극성을 부리고 몇몇 대형 교회 목사님의 일로 백성으로부터 칭찬을 받지 못하고 전도의 길은 막히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을 질타하는 목회자도 적고, 이단을 질타하는 신학 교수도 적다. 모두 조용한 가운데 자신에게 손해가 될 것을 생각하고 침묵하고 있다.
소위 ‘잘 믿는’ 성도들도 사회에 나갔을 때 모든 사람들 앞에서 “나는 기독교인”이라고 당당히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신앙이 별로 없지만 우리 집사람은 열심”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모든 사람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모습이 적다. 말 뿐이라도 비느하스처럼 하나님 편을 들며 분노하는 지성인들은 더더욱 보기 힘들다. 왠지 모르지만 그럴 사회 분위기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래서 “과연 나에게 무슨 이익이 있는가”를 따지는 사람이 많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높은 지위를 주시고 많은 부까지 주셨는데 그 많은 탤런트를 받은 사람은 다 어디로 갔는지 열심히 찾아보아야겠다. “비느하스여, 너 어디 있느냐”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는 지성 기독인을 기대해 본다.
비느하스의 창을 우선 나에게 겨누고, 그리고 하나님을 배반하는 자에게도 겨누어야 하지 않겠는가. 많은 성도들이 이단에 넘어가 신음하는 소리가 하나님께 전달되면 그에 대한 책임을 누구에게 물을 것인가 생각해 본다.
“하나님, 우리를 십자가 군병으로 세우소서. 이 어려울 때에 나를 주의 충실한 비느하스가 되게 하소서. 그리고 나 자신부터 당당하게 하시고, 세상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주의 종이 되게 하시옵소서.” 라는 기도를 드려본다.
한국유나이트문화재단 이사장, 갈렙바이블아카데미 이사장
[강덕영 장로 칼럼-종교인과 신앙인 (82)]레위지파의 칼과 비느하스의 창이 주는 교훈
입력 2014-06-10 15: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