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회화와 조각은 교회가 박해받던 시기에 카타콤(Catacomb)에서 장례미술의 형태로 태동하였다. 교회건축은 교회가 지상으로 나온 기독교 공인 이후에야 비로소 가능하였다.
2. 최초의 기독교 회화는 로마 제정 말기 박해를 피해 은밀히 모여 예배를 드리던 로마 시내 외곽의 지하묘지 카타콤의 벽화에서 출현하였다. 이 벽화들은 고대 고전(Greco-Roman) 미술이 이룩한 자연주의적, 미학적 관심보다는 영적인 것의 표현에 더 중점을 두었다.
이를 위해 상징주의적 방식과 설명적 방식을 취했는데 이러한 경향은 향후 동방교회의 비잔틴미술과 서방교회의 로마네스크, 고딕미술을 규정짓는 기독교미술의 중요한 흐름을 이룬다.
당시 프레스코기법으로 그려진 카타콤벽화 중 기독교적 모티프를 지닌 독창적인 도상은 오란트(Orant) 도상이다. 이 도상은 소매가 넓은 튜닉을 입고 하늘을 바라보며 두 팔을 벌려 기도하는 자세로서 이를 통해 초대교회 성도들의 믿음과 기도의 모습을 대면할 수 있다.
3세기 로마 근교 프리실라 카타콤에 그려진 오란트 도상은 기도자의 눈길이 하늘을 향함으로 초대교회의 초월적인 신앙과 깊은 영성을 보여주고 있다.
로마제국의 가혹한 박해를 풀무불에 던져진 세 히브리인의 모습(단 3:23)으로 묘사한 카타콤벽화(사진 2)와 도덕적으로 타락한 로마제국 말기의 상황에서 구원에 대한 염원을 노아의 방주 모습(사진 3)으로 표현한 4세기 벽화에서 이러한 오란트 도상을 확인할 수 있다.
3. 초대교회 당시 카타콤의 회화와 조각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대표적인 이미지(The Image of Christ)는 선한 목자(Good Shepherd)의 모습이다.
길 잃은 어린 양, 부상당한 연약한 양을 찾아 어깨에 둘러맨 선한 목자(요 10:11)의 모습은 초대교회가 지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과 기억 그리고 현재적인 체험의 반영이다. (사진 4, 5 카타콤벽화, 6 선한 목자 조각상)
하늘을 상징하는 중앙 원안의 선한 목자 상을 중심으로 구약성서 요나 이야기를 십자가 형태로 배열한 산 마르셀리노와 산 피에트로 카타콤 천정화는 비잔틴 성당의 돔을 연상하게 한다. 이 천장화는 카타콤 양식이 초기 비잔틴미술에 영향을 미친 전형적인 예이다(사진 7).
4. 초기 기독교 회화는 필연적으로 당대의 자연주의적 회화 양식을 반영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이미 카타콤벽화에서도 나타나는데 세례예식과 관련한 칼릭스투스 카타콤의 프레스코화 ‘반석을 쳐서 물이 나오게 하는 모세’는 토가를 입은 복식 형태에서만이 아니라 옷 주름으로 신체의 양감을 나타내는 그리스 로마 미술의 표현방식을 따르고 있다(사진 8).
4세기 중반에 제작된 ‘유니우스 밧수스의 석관’(Sarcophagus of Junius Bassus)의 부조 조각은 초기 기독교 미술이 그 당시 그레코 로만 알레고리 기법에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예이다.
장례 시 석관표면에 세속적인 내용을 부조한 로마인들과 달리 기독교인들은 성서의 이야기를 새겨 넣었는데 이 석관에는 이삭의 희생, 욥의 고난, 사자굴 속의 다니엘, 예루살렘 입성, 권좌의 그리스도의 모습 등이 조각되어 있다. (사진 9)
그런데 ‘권좌의 그리스도’에는 로마의 젊은 학자로 묘사된 예수 그리스도가 양쪽에 베드로와 바울을 거느리고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하늘의 신 우라노스가 받치고 있는 천상의 옥좌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석관 조각가는 이교도들의 모티프인 우주의 의인화(우라노스)를 그리스도의 발밑에 배치함으로 두 가지 의미를 나타내었다. 우주의 주인인 그리스도를 묘사하는 동시에 이교세계에 대한 기독교의 승리를 표현한 것이다. (사진 10)
5. 기독교가 제국종교가 된 4세기 말, 로마 산타 푸덴찌아나(S. Pudenziana)성당 앱스(후진)에 묘사된 그리스도 이미지는 더 이상 선한 목자나 젊은이의 모습이 아닌 천상의 예루살렘에서 사도들과 함께 있는 존엄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사진 11)
다른 인물들보다 월등히 크고 엄격한 인상을 지닌 존엄한 지배자(Maestas Domini) 로서의 그리스도 도상은 5세기에 확립된 이후 비잔틴미술의 크리스트 판토크라토르(Christ Pantocrator, 우주의 지배자)나 로마네스크 시대의 최후의 심판자, 승리자 도상으로 이어진다.
6.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대제는 카타콤에서 지상으로 나온 교회 건축물을 세우면서 이교의 신전을 연상시키는 고전적인 신전양식을 의도적으로 배제하였다.
그는 전통적으로 제국의 법이 시행되던 건물인 공회당, 바실리카(Basilica)를 개조함으로 교회와 국가 간의 연계를 강화하였다.
현재의 바티칸 대성당자리에 있던 옛 베드로 대성당(Old St. Peter)은 바실리카양식의 전형(Prototype)을 이루는 중요한 교회건축이다. (사진 12)
바실리카는 동쪽에 제단이 서쪽에 출입구가 위치함으로 동서의 장축을 지닌다. 서쪽 정면부(파사드)와 외부 세계 사이에는 주랑으로 둘러싸인 정사각형의 마당, 아트리움(atrium)이 위치하는데 이 마당은 11세기 로마네스크 건축에서 클로이스터(cloister)가 된다.
장방형의 바실리카양식의 교회(basilica-plan church) 외에 원형, 정사각형, 팔각형 등의 중앙집중식 양식의 교회(central-plan church)가 초기 기독교 건축의 기본 형식을 이루었다. 이들은 각각 서방교회와 동방교회 건축양식으로 발전한다.
바실리카 양식의 교회제단(Altar)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의미에서 태양이 떠오르는 동쪽에 위치하였다. 그리고 제단과 회중석을 구분하는 자리(앱스 앞부분)에 반원형 아치 형태의 개선문을 세움으로 죄와 사망, 어둠의 권세를 이긴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상징하였다. 이러한 반원형 아치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개선문(Arc of Constantine, 315년)에서 차용한 것이다.(사진 13)
로마 바울 대성당(San Paolo fuori le Mura, 4세기)에 세워진 제단 앞의 개선문을 통해 기독교공인 직후 초기 기독교의 분위기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사진 14)
콘스탄티누스대제는 경쟁자 막센티우스와의 밀비오다리 전투(312년)에서 ‘이것으로 정복하라’(In hoc signa vinces)는 전날 밤 꿈에 들은 음성에 따라 라바룸 십자가를 들고 나가 싸워 승리를 거둔다. 그리고 그 이듬해 기독교를 공인한다. 그의 개선문이 교회건축양식에 편입된 미술사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경륜을 깨닫게 된다.
임재훈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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