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성의 가스펠 로드] (15) 슬픈 역사가 묻어있는 쿠바 교회
입력 2014-05-31 02:37
혁명가 체 게바라(1928∼1967)가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나라 쿠바. 사회주의 국가에서 예배를 드리리란 생각은 하기 힘들었다. 사전 정보가 전혀 없었다. 교회에 대한 정보를 찾던 중 수도 아바나의 랜드 마크인 카피톨리오(Capitolio) 뒷골목에서 예배가 있다는 소식을 우연히 전해 들었다. 동행자가 있었다. 믿음으로 ‘광야 자전거 여행’을 함께하기로 결의한 스물한 살의 준호 형제였다. 우리는 주일 오전 여기저기 물어가며 교회를 찾았다. 별 다를 것 없는 중남미 현지 예배를 상상했다.
“환영합니다. 여기 한국인들이 있어요!”
예배가 끝나자 앳된 소녀가 우리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열여섯인 아이의 이름은 애리였다. 그는 현지 목회자의 딸이자 두 살 어린 사촌 동생을 소개시켜 주었다. 그 아이 역시 세리라는 한국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예배를 마치고 나온 할머니는 영락없는 한국 얼굴이었다. 현지 목회자인 다비드씨도 이(Lee)씨 성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중남미 교회와 다른 점이 바로 이것이었다. 이곳엔 한국인들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 우리 조상들은 멕시코 유카탄 반도에서 노동 착취를 위해 노예로 끌려왔었다. 그중 일부가 다시 쿠바에 발을 딛게 되었고, 조국 광복의 기쁨에도 불구하고 끝내 탈출에는 실패했다. 그때부터 정착하게 된 한인 후손들이었다.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교인은 수십명이나 됐다. 이들은 1세기가 지나도 고국을 잊지 않고 있었다. 이들과 친해지게 되었다. 매년 수많은 한국인이 쿠바를 여행한다. 아바나 거리에서 한국 여행자를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조용한 뒷골목에서 역사의 흔적을 선명하게 기억하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찾아가는 이는 드물다. 반가움 때문이었는지 교인들은 집으로 초대했다. 단출한 식사와 차를 대접하며 얘기를 나누었다. 나는 쿠바인이면서도 한국인인, 한국인이면서도 쿠바인인 이들의 얘기에 마음의 귀를 쫑긋 세웠다.
쿠바 자전거 여행을 할 적에는 주일마다 각 지방 정부로부터 허가를 받은 현지 교회를 찾아 예배를 드렸다. 여행을 마치고 나서 다시 아바나 뒷골목을 찾았을 땐 더욱 자주 교회를 드나들며 예배와 교제를 나눴다. 김치도 만들어 먹었다. 비록 고춧가루가 듬성듬성 뿌려진 묽은 양배추김치였지만 모양은 중요하지 않았다. 또 한글을 배우는 시간에는 문화도 함께 경험하고자 윷놀이를 했다. 전통 민요도 불렀다. 한 무명 선교사의 극진한 섬김 때문이다. 선교가 엄격하게 금지된 땅이다. 그래서 그는 매번 쿠바에 들어올 때마다 관광 비자로 한 달간 체류하면서 복음과 한국 문화를 전하고는 다시 국경 밖으로 나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애리는 자신의 집에 나와 준호 형제를 초대했다. 역시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가족들이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10대 소녀의 방엔 태극기가 걸려있었고,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모델 사진, 그리고 한국 영화 CD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자신의 뿌리를 아는 것이다. 내가 한국에서 누리는 평범한 것들이 다른 이에겐 얼마나 갈망하는 소중한 것일까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한 달간의 쿠바 여행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아픔에 젖은 채 살아가는 같은 핏줄을 만나게 하셨다. 이들 역시 나와 동일한 하나님을 믿고, 찬양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시간이 흐를수록 자꾸만 더 소외되어 가는 형제에게 어떤 위로를 해줄 수 있을까. 나는 기도하며 다시 한 번 이들과의 인연이 이어지기를 소망했다. 쿠바 교회 성도들은 나와 준호 형제를 보내며 웃고 있었지만 왠지 서글프게 느껴졌다.
문종성 (작가·vision-mat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