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표와 성취의 땅, 이스라엘] (3) 말씀으로 살 것이라

입력 2014-05-30 02:07


“네가 하나님 아들이거든” 마귀의 시험에 든 예수님 신명기 말씀으로 물리쳐

성경에 기록된 예수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열두 살까지밖에 없다. 그리고 그가 집을 떠나 요한을 만나러 가신 것은 30세쯤이었다.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눅 3:23)

이를 두고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18년 동안 그가 어디서 무엇을 하셨는지에 대해서 여러 가지 황당한 추측들이 있기도 했다. 그가 후일 가르치신 내용으로 보아 애굽에 가서 공부를 했다느니, 인도에 다녀왔다느니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오직 그가 두루마리에서 읽은 것만을 가르쳤다.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 말하노라.”(요 8:26)

이미 예수께서 오시기 970년 전에 솔로몬의 뛰어난 지혜에 관한 소문을 온 천하의 왕들이 다 듣고 있었다.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심히 많이 주시고 또 넓은 마음을 주시되 바닷가의 모래같이 하시니 솔로몬의 지혜가 동쪽 모든 사람의 지혜와 애굽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난지라.”(왕상 4:29-30) 그래서 천하의 모든 왕들이 솔로몬의 지혜를 배우려고 사람을 파견했다.

“사람들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러 왔으니 이는 그의 지혜의 소문을 들은 천하 모든 왕들이 보낸 자들이더라.”(왕상 4:34)

솔로몬에게서 배워 간 것이 애굽과 인도 등으로 들어갔고, 그곳 박사들의 학문이나 술사들의 경전에 인용되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구약의 두루마리에 기록된 말씀을 가르쳤으므로, 솔로몬에게서 배워 간 다른 나라의 지혜들과 일부는 공통점이 있을 수도 있었다. 어쨌든 예수는 30세가 될 때까지 나사렛을 떠난 적이 없었다. 적어도 책임감이 강하고 성실한 장자라면 홀어머니와 여섯 명의 동생들을 버려두고 집을 떠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꾸준히 나사렛 회당에 드나들며 율법서와 시편과 선지자들의 글을 읽었다. 요셉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가장 큰 관심사는 역시 ‘죽음’의 문제였다.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6-17)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했다. 먼저 빛이 있으라고 말씀한 것은 생명을 창조했다는 뜻이고, 그 말씀은 곧 생명의 근원이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다면 그것은 생명을 포기하는 것, 곧 죽음을 의미했다. 즉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서 ‘죽음’이 시작된 것이다. 그가 이 ‘순종’의 원리를 깨닫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순종하는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눅 2:51) 그리고 또 그는 착한 사춘기를 보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 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 2:52)

그가 목수 일을 하면서 세상일에 그냥 무관심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늘 기도하는 습관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나 명령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당장은 홀로 되신 어머니와 동생들을 보살피는 것이 그분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의 나이 30이 되자 아우들이 생계를 이어받을 만한 나이도 되었고, 마침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었기 때문에 집을 떠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요단 강에서 놀라운 음성을 듣는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

그러나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말씀은 그것뿐이었다. 이제부터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하라는 지시는 없었다. 여리고로 가는 길에 세례 요한의 제자가 되어 있던 요한과 안드레, 그리고 안드레의 믿음직한 형 시몬을 만나 그를 게바라고 불러 주었으나 그들은 물러가 버렸다. 그리고 이튿날 갈릴리로 돌아가는 길에 벳새다 사람 빌립의 친구인 가나 사람 나다나엘을 만나 놀라운 고백을 듣는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요 1:49)

예수는 갑자기 그냥 갈릴리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아들’과 ‘이스라엘의 임금’은 서로 유사할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는 두 가지의 명제였다. 예수는 이 두 개의 명제 사이에서 정답을 얻어야 했다. 그는 빌립과 나다나엘을 다시 만나기로 하고 그들과 헤어졌다.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마 4:1-2)

흔히 광야에서 만난 마귀의 세 가지 시험을 배고픔과 명예와 권력에 대한 시험으로 간단하게 해석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을 무너뜨리려는 마귀의 시험에는 좀 더 무서운 음모가 숨겨져 있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그것이 바로 마귀가 펼친 작전의 핵심적 과제였던 것이다.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 4:3)

아버지가 돌을 창조했는데 만약 아들이 그것을 떡덩이로 만들면 그것으로 아버지와 아들은 충돌하게 되고, ‘순종’은 순식간에 날아가 버린다. 마귀는 바로 그것을 노린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신명기의 ‘말씀’으로 이 무서운 시험을 물리친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3)

마귀의 두 번째 시험도 역시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공격이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마 4:6)

아들의 구원 사역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유월절의 고난과 칠칠절의 성령 강림을 거쳐 초막절의 영광에 이르게 하는 것이었다(신 16:16). 그런데 성전에서 뛰어내리고 천사들이 떠받들어 영광으로 직행한다면 이 역시 아버지와 아들의 작전 개념이 충돌하게 된다. 예수께서는 이 시험도 신명기의 ‘말씀’으로 격퇴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라.”(신 6:16)

세 번째 시험은 더 어려운 미혹이었다.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 4:9)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했으므로 천하 만국이 다 그분의 것인데 마귀는 그것을 제 것인 듯 네게 주겠다고 했다. 이때 만일 예수께서 누가 네게 천하 만국을 주었으냐고 반박하면 그로 하여금 온 천하를 꾀도록(계 12:9) 허용하고, 하나님을 떠나면 알지 못하던 세상의 우상을 섬기게(신 28:64) 하신 아버지의 조치를 아들이 반박하는 결과가 된다. 예수께서는 이것 역시 신명기의 말씀으로 물리쳤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신 6:13)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마귀와의 첫 번 전쟁을 ‘말씀’으로 승리하신 것이다.

글=김성일 소설가, 사진 제공=이원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