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볼라뇨 바이러스’ 한국 감염시킨다
입력 2014-05-30 02:42
볼라뇨 전집/열린책들
“새로운 생각으로 넘쳐나는 화수분, 또는 바이러스…. 바이러스는 채 십년도 지나지 않아 다행히도 소설의 회의적인 반항기에 저항하는 백신을 투여 받지 않은 수백만의 독자를 감염시켰다.”
멕시코 문학의 젊은 거장 호르헤 볼피는 이 사람을 ‘바이러스’라 칭했다. 볼피가 말한 바이러스는 칠레 출신의 세계적 소설가인 로베르토 볼라뇨(사진)다.
칠레에서 태어나 멕시코에서 청년기를 보낸 그는 1993년 데뷔해 2003년 50세의 나이로 간질환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장르를 넘나드는 장·단편 소설 10여편을 남겼다.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스페인어권의 각종 문학상을 휩쓸었다. 사람들은 그를 ‘백년간의 고독’으로 노벨상을 받은 콜롬비아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1927∼2014) 이후 라틴 아메리카에 등장한 최고의 작가라 평했다.
혹자는 그의 글을 읽는 것이 난해한 암호를 해독하는 것과 같다고 평가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볼라뇨 바이러스에 감염되기를 주저하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다. 실존과 허구를 뒤섞거나 사건의 결말을 감춘 뒤 작품과 작품 사이의 연결 고리를 만드는 ‘스핀 오프’ 전략을 구사하는 등 독특한 문학 실험을 선보여서다. 그의 작품엔 범죄, 죽음, 창녀의 삶 등 어둠의 세계와 문학 또는 문학가들에 관한 이야기, 여기에 암담했던 라틴 아메리카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통렬한 성찰이 담겨 있다. 위트 넘치는 풍자를 통해 허구와 사실을 절묘하게 결합하는 것이 볼라뇨 소설의 매력이다.
도서출판 열린책들이 볼라뇨의 첫 번째 장편이었던 ‘아이스링크’를 지난 15일 출간하는 것으로 그의 소설 12종 17권을 완역했다. 이를 기념해 ‘로베르토 볼라뇨 컬렉션’을 내놨다. ‘아메리카의 나치문학(을유문화사)’을 제외하고 볼라뇨가 세상에 내놓은 소설들이 이 컬렉션에 모두 들어있다.
‘2666’은 스페인의 블라네스에서 수술도 미뤄가며 집필에 몰두한 역작이다. 연쇄 살인마와 유령 작가라는 두 가지 축을 통해 전쟁, 독재, 대학살로 점철된 20세기에 인간의 악이 어떻게 태어나고 진화했는지를 파헤친다. 배경은 산타테레사. 멕시코 실제 도시인 후아레스를 모델했다. 후아레스는 현재까지 미해결 사건으로 남아 있는 여성 연쇄 살인 사건이 일어난 곳이다. ‘야만스러운 탐정들’은 볼라뇨와 그의 절친 마리오 산티아고 파파스키아로 각각의 분신인 벨라노와 리마가 주인공이다. 30년 세월 동안 두 사람이 누구를 만나고 어떤 사건을 겪는지 집요하게 좇는다. 이 소설로 볼라뇨는 라틴 아메리카의 노벨문학상인 로물로 가예고스상을 수상했다.
볼라뇨를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기회도 마련됐다. 볼라뇨의 작품 세계를 가장 잘 이해했다는 평가를 받는 쿠바 출신의 화가 알베르토 아후벨의 그림전이 다음달 15일까지 경기 파주시 미메시스 아트뮤지엄에서 열린다. 볼라뇨의 팬들과 비평가들이 볼라뇨에 대해 쓴 문집 성격의 단행본 ‘볼라뇨 전염병 감염자들의 기록’도 함께 나왔다. 볼피를 비롯해 국내 작가로는 소설가 장정일 등의 글이 수록됐다. 가격도 볼라뇨의 대표작인 2666에 맞춰 2666원이다.
서윤경 기자 y27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