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창준 (18) 정치도 하나님 사업… 도와주신 분들께 감사를

입력 2014-05-30 02:30


2년 전 출범한 ‘김창준 정경아카데미’는 요즘 가장 역점을 두는 일이다. 반세기 가까이 미국에 살면서 사업을 일구고 미국의 중앙정치무대를 경험한 유일한 한국인인 내가 후배들에게 노하우를 전수하고자 만든 기구다.

미국을 바깥에서 보고 평가하는 건 수박 겉핥기일 수밖에 없다. 제대로 알기 위해선 미국 의회 안에 들어가서 한국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아카데미의 목적은 한국 정치의 선진화와 올바른 정치인 양성, 그리고 선진국형 경제인 양성에 있다. 하나님 사업을 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일 것이다. 나는 아카데미를 통해 그 사명을 감당하고 싶었다.

아카데미와 더불어 대통령 경제자문 기관인 국민경제자문회의에도 몸담고 있다. 공정거래분과 자문위원으로서 정부 규제를 줄이는 방법과 중소·중견기업들의 성장을 위해 국가 방침을 어떻게 정할지에 대해 자문하고 있다.

정치 일선에서 한발 물러나서 보니 보이지 않는 것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간과했던 주위 사람들의 소중함과 그들에 대한 고마움이었다.

무엇보다 소중한 사람들을 빼놓을 수 없다. 가장 먼저 꼽을 이는 제니퍼 안(한국명 안진영), 바로 내 아내다. 실용적이고 낙천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마다 용기를 북돋아주는 존재다. 항상 명랑하게 웃으면서 “뭘 그런 걸로 걱정하세요”라며 토닥여주는 그녀와 함께 살다 보니 툭하면 화를 내던 내 성격도 많이 수그러들었다.

아내는 10남매 중 넷째로 맏언니인 고 안진현씨와 많이 가까웠다. 처형인 안진현씨는 ‘국민가수’ 조용필씨의 부인이었다. 처형과 아내는 외모는 물론 성격까지 비슷했다. 두 가정 모두 워싱턴에서 가까운 곳에 살았다. 조용필씨는 손윗동서이지만 내가 나이가 더 많다며 항상 깍듯이 대접해줘서 흐뭇했다.

처형은 평소 심장이 약했다. 2002년 12월 심장 수술로 유명한 미국 클리블랜드 병원에서 수술을 마치고 메릴랜드 포토맥 자택에서 요양하던 중 이듬해 1월 하늘나라로 떠났다. 그때가 54세였다.

생전의 처형은 한국과 미국을 한 달에 한 번꼴로 오가며 바쁜 남편을 뒷바라지하면서 사업도 잘 일궜다. 자선단체에 기부도 많이 했다. 조용필씨도 처형을 많이 의지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요즘도 한국에 오면 조용필씨를 자주 만난다. 공연 때마다 티켓을 보내줘서 콘서트도 관람한다. 아직도 처형 산소에 가서 벌초도 직접 하며 아내를 그리워하는 모습을 볼 때 천재적인 가수 이전에 자상한 남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업무적으로 보면 뉴트 깅리치 전 미연방하원의장을 빼놓을 수 없다. 내가 공격을 받고 어려울 때마다 항상 내 곁에서 나를 지켜준 사람이다.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다.

“정치는 나를 반대하는 사람들로부터 마음을 얻으려 하기보다는 나를 따르는 지지자들을 더욱 견고히 단결시키고 한 명도 잃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대만이 핵폐기물을 북한에 팔아넘기려고 했을 때 이를 막느라 동분서주하는 나를 도와준 동지이기도 하다.

내 선거운동을 도와줬던 선거 캠페인 매니저 밥 가우티도 잊지 못할 사람이다. 그는 말을 짧게 하지만 주저하지 않고, 원하는 말을 언제 어디서든 하고야 마는 사람이다. 정치 신념도 뚜렷하다. 그 덕분에 나의 정치적 신념 역시 더욱 뚜렷해졌고 미국 정치의 어두운 단면도 들여다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다. 주일 설교를 위해 밤을 새워 준비하시는 신학대 교수 출신 목회자로 메시지뿐만 아니라 인격적으로도 본이 되시는 분이다. 이들을 만나게 도와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정리=박재찬 기자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