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도원욱] 담쟁이처럼
입력 2014-05-30 02:22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도종환 시인의 ‘담쟁이’이다. 이 시를 읽고 난 후에는 제철을 맞은 담쟁이덩굴이 예사로워 보이지 않는다. 푸른 이파리 한 잎, 한 잎이 우리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습과 꼭 같다. 힘이 없어도 선량했고 어려운 때마다 마음을 모아 때마다 절망의 담벽을 넘어 왔다. 시인의 통찰력도 눈부시지만 자연이 주는 교훈도 새삼 경이롭다. 식민지와 사변으로 헐벗은 이 나라에 오직 담쟁이같이 끈질긴 생명력만이 넉넉한 자원이지 않았던가!
남 탓 말고 스스로 돌아봐야
그런데 이번 일만큼은 꽤 시간이 걸릴 것만 같다. 허탈하기도 하고, 실망감과 무력감이 국민 정서를 한동안 짓누르고 있을 것만 같다. 안산의 한 목회자께서는 세월호로 인해 교인인 아이들 8명 가운데 7명을 잃고, 지난 몇 주 동안 주일 강대상에 서실 수도 없으셨다. 기자 앞에서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고 손사래를 치셨지만, 결국 “51%가 지도자들의 잘못이라면 49%는 그들을 뽑은 우리들의 몫”이라고 일침을 놓으셨다. 남 탓보다는 각자 스스로를 돌아보자는 것이다. 필자도 역시 지난 2월에 ‘리더십보다 팔로어십’이란 제목으로 이 지면에 팔로어십, 즉 국민들의 역할이 필요한 때임을 밝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번 6·4지방선거를 소홀히 할 수 없다. 선거권은 국민의 가장 신성한 권리이자 의무다. 이번에도 무심코 오락과 연휴의 이름으로 이 소중한 사명을 대체하려 했다면 마음의 반성을 행동으로 나타내 보여야 한다. 청년들도 선거권을 가볍게 여기지 않기를 바란다. 출마자들의 공약과 정직성을 어느 때보다 유념하여 살펴보고, 객관적이고 성숙한 주인의식을 표명해야 한다. 혈연, 지연, 학연과 종교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우리 모두가 승선하고 있는 이 나라의 배가 또 한번 위기를 맞게 될 것이 자명한 일이다.
국가에 대한 교회의 책임 커
가장 큰 책임은 교회에 있다. 진보적 신학자 월터 윙크는 ‘세상 권세와 관련된 교회의 사명’을 “그들의 우상적인 가면을 벗기고, 그들의 비인간화하는 가치들을 규명하고, 그들이 입은 고상함의 옷을 벗기고, 그들의 희생자를 해방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권세란 국가 정부와 리더십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것은 원래 선한 목적으로 창조되었으나(골 1:16) 죄와 함께 타락했다. 타락한 권세는 사람을 노예화시키게 된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권세가 결국엔 십자가와 빈 무덤에서 그리스도께 굴복되고 말았다. 이제 그것들의 사명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구속사의 주역인 인간 생명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승리는 우주적인 것이다(골2:10)!
교회가 이를 다시 한번 기억하고 그분의 광대한 승리에 참여해야 한다. 기만적이고 생명을 업신여기는 권세를 향하여 침묵해서는 안 된다. 또한 그분의 승리를 개인적이고 영적인 것으로만 축소시킬 때 온전히 사명을 감당치 못할 것이다. 지금까지 구원에 관해 지나치게 단편적인 접근을 해 오지는 않았는지, 숫자에 연연하여 본질을 놓친 것은 아닌지 정직하게 되돌아보고 건전한 신학과 사명을 되찾아야 한다. 담쟁이덩굴이 제 아무리 무성하다 할지라도 그 뿌리 내린 땅이 오염되어 있다면 결국 절망의 담벽을 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도원욱 한성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