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위대한 링컨? 평범한 제퍼슨?
입력 2014-05-30 02:15
인디스펜서블/가우탐 무쿤다/을유문화사
“국가보안법은 칼집에 넣어 박물관에 보내야할 녹슨 칼”이라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말했지만 이 법을 폐지하지 못했다. 지지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라크 전쟁에 파병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보편적 복지제도의 핵심인 국민건강보험제도를 도입했고, 선진국의 경제학자들의 견해와 정반대로 포항제철 같은 중공업에 국가역량을 집중했다.
진보 정권의 대통령도 보수적인 정책을 써야만 했고, 보수 정권도 때로는 틀을 깨는 정책을 과감하게 도입한다. 흔히들 말하는 역사의 아이러니다. 이렇게 보면 역사의 큰 흐름 속에서 지도자 한 사람의 역할은 의외로 미미해 보인다. 그렇다면, 선거를 통해 1번 후보가 뽑히든 2번 후보가 뽑히든 6번 7번 후보가 선출되든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시대가 인물을 만드는가, 인물이 시대를 만드는가’라는 리더십에 대한 오래된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이 책의 저자 하버드 경영대학원 조직행동학부의 가우탐 무쿤다 교수는 미국 대통령과 영국 총리의 역할을 탐구했다. 그는 역대 미국 대통령과 영국 총리를 크게 2종류로 분류한다. 다른 사람이 같은 자리에 있었어도 마찬가지 역할을 했을 ‘대체가능한’ 지도자와, 그야말로 시대를 개척한 ‘대체불가능한(indispensable)’ 지도자다.
우리가 잘 아는 에이브러힘 링컨이나 윈스턴 처칠은 대체불가능한 지도자로 분류되고, 토머스 제퍼슨과 네빌 체임벌린(히틀러에 유화적이었던 영국의 2차대전 직전 총리)은 누구라도 했을 역할을 수행한 평범한 지도자로 평가됐다.
대체가능한 지도자의 특징은, 일련의 정치적 과정을 통해 어느 정도 검증된 인물들이라는 점이다. 여러 차례의 선거를 통해 언변과 신념이 대중에게 받아들여진 인물이다. 무쿤다 교수는 이를 ‘여과된 지도자’라고 지칭한다. 이런 지도자는 대체로 시대의 흐름을 따라갔다. 진주만 공격을 당한 미국 대통령이라면 누구라도 일본과 전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반면 정치가로 성장하는 계단을 무시하고 등장해 지도자의 위치에 오른 ‘비여과형 지도자’도 종종 등장한다. 말하자면 다크호스다. 이 책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런 인물들은 한 시대를 장식할 특별한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크다. 비여과형 지도자라고 좋은 지도자인 것은 아니다. 주지사 경력 밖에 없었던 조지 W 부시는 이라크 전쟁을 일으켰고(민주당의 존 케리가 대통령이 됐다면 이라크를 공격했을까?), 오바마도 아직까지는 그다지 성공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위대한 지도자는 그러나 비여과형 지도자다. 역대 최고의 미 대통령으로 꼽히는 링컨은 전쟁광으로 불리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분리독립을 선언한 남부 지역과의 갈등이 전쟁으로 치달을 때, 자신이 속한 공화당 내에서도 평화 협상을 선택하자는 목소리가 높았다. 하지만 링컨은 연방을 지키고 노예를 해방하기 위해 전쟁을 불사하는 길을 선택했다. 대선 후보를 두고 링컨과 경쟁했던 상원의원 윌리엄 헨리 수어드나 셀먼 체이스는 엘리트 교육을 받고 오랜 공직 경험을 쌓았으나, 분리독립을 승인하기를 주장했다. 미국인이 링컨 대신 ‘여과된 지도자’를 선택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물론 대체가능한 평범한 지도자라고 다 실패한 지도자는 아니다. 제퍼슨은 미국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프랑스의 통치자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에게서 루이지애나 땅을 헐값에 사들여 미국이 20세기 최강국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다른 인물이 그 자리에 있었어도 비슷한 결정을 내렸겠지만, 어쨌든 그는 자신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시대는 항상 다급해 보이고, 유권자들은 메시아 같은 능력을 발휘할 지도자를 요구한다. ‘대체불가능하면서도 성공적으로 역할을 수행할 지도자’가 어느 때나 이상적으로 보인다. 다크호스, 서민의 자식, 정치 개혁 같은 말에 유권자들의 마음이 더 끌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무쿤다 교수는 그러나 “최고의 지도자를 고르겠다는 접근 방식은 틀렸다”고 충고한다. 최고의 지도자를 고르려다 최악의 지도자를 선택하는 사례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위대한 지도자는 자신감과 겸손함을 함께 갖춰야 한다는 것이 무쿤다 교수의 결론이다. 과감한 선택을 즐기는 비여과형 지도자일수록 때로는 주변의 옳은 충고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주장을 돌이킬 줄 알아야 실패할 확률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문제는 선거 전단지를 아무리 뒤져도 그런 후보가 드물다는 것. 굳이 위험을 무릅써야할 상황이 아니라면, 차라리 평범하고 대체가능한 지도자가 무난한 선택일지도 모르겠다. 박지훈 옮김.
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