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오프너 ‘안나’ 만든 알레산드로 멘디니 “한국 젊은 작가들 전통의 현대적 해석 바람직”

입력 2014-05-29 03:54


하늘거리는 주름치마를 입은 단발머리 여인이 수줍게 미소를 지은 채 팔을 늘어뜨리고 있다. 그의 가늘고 긴 목이 돌아가자 춤을 추듯 팔이 올라갔다. 그의 이름은 안나다.

와인이나 디자인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여기까지의 설명에서 떠올리는 물건이 있을 것이다. 와인 오프너다. 안나는 이탈리아 출신으로 세계적 산업디자이너이자 건축가인 알레산드로 멘디니(83)가 이탈리아 주방기기 업체인 알레시사와 협업해 1994년 만들었다.

멘디니는 당시 자신의 연인이었던 발레리나 안나 질리의 춤추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와인의 코르크 마개를 여는 기능만 하던 오프너에 ‘안나’라는 여성의 이미지를 덧입히면서 이 제품은 지금도 1분에 1개씩 팔려나가는 베스트셀러가 됐다.

28일 서울 예술의전당 디자인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국민일보 주최 ‘디자인 아트 페어’ 현장을 찾은 멘디니를 만났다. 자신만의 디자인 철학을 묻자 와인 오프너 안나의 얘기를 꺼내면서 “어떤 오브제든 기능만 있어서는 안 된다. 오브제와 쓰는 사람이 관계를 형성하는 감동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LG전자 한국도자기 포스코 등 국내 기업과 협업하는 등 한국과도 깊은 인연이 있다. 그가 본 한국은 전혀 다른 두 특성이 공존하는 곳이었다. 외양은 소심해 보이지만 기술은 진보적이라는 것이다. 이를 하나에 담아내는 건 어려워 보였다. 이번 디자인 아트 페어에서 그런 고민을 해결한 젊은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고 멘디니는 말했다.

멘디니는 “13년 전 한국에 처음 왔을 때는 디자인적 요소를 보기 어려웠는데 최근엔 달라졌다”면서 “젊은 한국 작가들이 전통 소재를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등 다양한 시도에 나선 것”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작가 김동현은 한지를 이용해 현대적 감각의 스탠드로 재탄생시켰고 최루시아는 붓글시를 캘리그래피(손으로 그린 그림문자)로 발전시켰다.

한국 디자인이 세계적으로 성장하기 위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멘디니는 “한국인이 유럽과 미국 감성을 담을 필요가 없다”면서 “한국 디자인의 경쟁력은 한국적인 것”이라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디자인 페어 현장에서 만난 20대 젊은 작가 조민서씨의 얘기를 전하며 그의 계획을 물었다. 자신의 미디어아트 작품인 돌고래(Where are Whales?)에 멘디니의 사인을 받았다는 조씨는 “학교에서 배웠던 사람을 실제로 봤다”면서 “눈에는 아직도 꿈이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이 말을 전했더니 멘디니는 활짝 웃었다.

“나는 한 번도 내가 늙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어요. 삶에 대한 궁금증을 갖고 있다면 늘 즐겁게 살 수 있습니다.”

그는 네오모던 스타일과 현대적 디자인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가구 인테리어 건축 설비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알레시 필립스 스왈롭스키 스와치 등 세계적 회사와 함께 일했고 베자렐 예술 아카데미와 예루살렘 디자인의 명예회원이다. 그는 내년에 한국에서 대규모 개인 전시회를 갖는다.

서윤경 기자 y27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