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전 ‘국제 로맨스’는 황홀했다… 부산관광공사 개발 ‘허황후 신행길’

입력 2014-05-29 02:56


문헌에 기록된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결혼은 지금으로부터 1968년 전인 서기 46년 경남 김해에서 성대하게 거행됐다. 화제의 주인공은 금관가야의 시조 김수로왕과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의하면 황옥 공주는 수로왕과 결혼하기 위해 붉은 돛과 기(旗)를 단 돌배를 타고 수만리 뱃길을 달려 부산 앞바다에 위치한 망산도(望山島)에 상륙했다.

황옥 공주가 오라버니 장유를 비롯해 대규모 사신단과 함께 도착한 망산도는 거북등처럼 쩍쩍 갈라진 돌로 이루어진 작은 바위섬이다. 부산 강서구와 창원 진해구 경계에 위치한 망산도는 가덕도를 비롯한 부산 앞바다의 크고 작은 섬이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곳이었다. 지금은 녹산산업단지와 부산신항이 들어서면서 일대가 매립돼 옛 정취를 완전히 잃었지만 불과 20년 전만 해도 망산도는 보석처럼 아름다운 섬이었다.

부산관광공사가 스토리텔링 관광상품으로 개발한 ‘허황후 신행길’은 이 망산도에서 시작된다. 신행길은 혼인할 때 신랑이 신부 집으로 가거나 신부가 신랑 집으로 가는 길을 말한다. 대부분의 설화가 그렇듯이 극적인 로맨스는 꿈에서 비롯된다. 황옥 공주의 부친은 꿈속에서 “가락국의 김수로왕은 하늘이 내려 보낸 사람이나 아직 배필을 얻지 못했으니 공주를 보내 짝을 맺으라”는 계시를 받았다. 알에서 태어나 즉위한 지 7년이 지난 김수로왕도 국혼을 청하는 신하들에게 “하늘이 배필을 보내줄 것”이라며 “망산도에 가서 붉은 돛을 단 배가 오면 즉시 알려라”고 명령을 내렸다.

허황후 신행길은 부산 강서구를 비롯해 창원 진해구, 김해시 등 3개시에 걸쳐 산재해 있다. 황옥 공주가 오랜 항해 끝에 첫발을 디딘 망산도는 행정구역 개편으로 부산 강서구로 편입됐지만 창원 진해구 땅을 밟아야만 접근이 가능하다.

망산도에서 동북쪽으로 70m 거리에 위치한 유주암(維舟巖)은 공주가 타고 온 돌배가 돌아가는 길에 뒤집혀 바위가 되었다고 전해지는 암초이다. 망산도의 바위처럼 거북등을 닮은 유주암은 망산도 건너편 공단 제방에서 보면 잘 보인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바탕으로 허황옥의 설화를 새긴 유주비(維舟碑)는 1908년 후손이 세운 것으로 망산도에서 1㎞ 떨어진 진해구 용원동 야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설레는 가슴을 안고 가락국에 도착한 황옥 공주는 혼례를 치르기 위해 수로왕이 기다리고 있는 행궁으로 향한다. 20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면서 지형이 바뀌고 도시와 공단이 들어서 옛길을 가늠할 수는 없지만 향토사학자들은 황옥 공주 일행이 명월산 자락을 에두르고 장고개를 넘어 행궁으로 갔다고 추측한다.

행궁의 위치는 알 수 없지만 황옥 공주와 혼례를 치른 수로왕은 산자수명한 명월산 계곡으로 신혼여행을 가 이틀 밤을 보냈다고 한다. 망산도에서 10㎞ 떨어진 부산 강서구의 흥국사 터가 허니문을 보낸 곳으로 수로왕은 허황후의 미모를 달에 비유해 산 이름을 명월산으로 짓고 훗날 명월사를 지어 나라의 태평성대를 기원했다고 전해진다. 그 명월사가 오늘날의 흥국사로 1.3㎞ 길이의 호젓한 산길은 신록이 나날이 짙어가고 있다.

흥국사는 조그만 산사로 벽오동 서너 그루가 입구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흥국사 터가 김수로왕과 허황후의 허니문 장소로 특정된 데는 이곳 절터에서 사각형의 돌조각 ‘사왕석’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극락전에 보존된 사왕석은 부처상 양 옆으로 코브라상이 새겨진 돌로 허황후가 인도에서 시집왔다는 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물 중 하나이다.

명월산에서 허니문을 보낸 김수로왕과 허황후는 가락국의 수도 김해로 환궁한다. 부부는 이곳에서 아들 10명과 딸 2명을 낳고 가락국을 태평성대로 이끈다. 김수로왕의 아들 중 첫째는 다음 왕이 되고, 둘째와 셋째는 김해 허씨의 시조가 됐다고 한다. 삼국유사는 김수로왕이 158세로 세상을 뜨자 궁궐의 동북쪽 평지에 빈궁을 짓고 장사지냈다고 전한다. 당시는 낮과 밤을 각각 하루로 기록했다는 설이 있어 실제 나이는 79세 가량으로 추정된다.

수로왕릉은 가락국의 고도인 김해 중심가에 위치하고 있다. 소나무 숲에 둘러싸인 수로왕릉은 지름 22m, 높이 6m의 원형 봉토분으로 신라 왕릉처럼 웅장해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고개를 숙이게 한다. 경내에는 위패를 모신 숭선전을 비롯해 안향각, 전사청, 숭안전 등 제례를 위한 건축물이 웅장미를 더한다. 반면에 구지봉 동쪽에 위치한 수로왕비릉은 지름 17m, 높이 5m로 수로왕릉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신비로운 기운이 느껴진다.

수로왕비릉 앞에는 황옥 공주가 인도에서 건너올 때 바람과 파도를 잠재우기 위해 돌배에 싣고 왔다는 파사석탑(婆娑石塔)이 전각 속에 보존되어 있다. 크기가 다른 6개의 돌을 탑처럼 쌓은 파사석탑은 본래 호계사에 있었으나 조선시대 김해부사 정현석이 “이 탑은 허황후께서 아유타국에서 가져온 것이니 허황후릉에 두어야 한다”며 옮겼다고 한다. 붉은 빛이 도는 무늬가 희미한 파사사탑의 돌은 인도가 원산지로 우리나라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돌이라고 한다.

허황후 신행길의 종착점인 수로왕릉과 수로왕비릉은 직선거리로 900m 정도 떨어져 있다. 우리나라 최초로 국제결혼을 통해 다문화가정을 이룬 금슬 좋은 부부가 죽어서 한 곳에 묻히지 못한 까닭은 무엇일까? 역사학자들은 허황후는 단순한 왕비가 아니라 김해 허씨 세력을 대표하는 정치 지도자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한 곳에 묻히지 못한 때문인 지 죽어서도 더 애틋해 보이는 김수로왕과 허황후. 비록 20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국제결혼으로 화제를 모은 가락국 시조의 로맨스가 ‘허황후 신행길’ 등장으로 다시 조명을 받고 있다.

부산·김해=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