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창준 (17) 무릎꿇고 오만함 회개하니 ‘꿈의 3선 의원’ 허락
입력 2014-05-29 02:23
오랜만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드렸다. 그동안 하나님을 잊고 살아온 나의 오만함에 대한 회개가 자꾸 나왔다. 한참을 기도하고 나니 마음속에 평안함이 샘솟는 것 같았다. 다시 기운을 차렸다. 그리고 나를 향한 공격에 꿋꿋하게 맞서기로 했다. 양심상 부끄러운 것도 없었고, 지역구민을 위해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의정활동 틈틈이 지역구로 날아가 지역의 문젯거리를 처리했다. 그 결과 압도적인 표 차로 재선에 성공했다. 초선 때보다 더 열렬한 지지를 보내주었고, 3선에 도전해서 성공했다. 모두가 희망하는 ‘꿈의 3선 의원’이 됐다.
초심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뒤에도 그 마음이 그대로 남아 있기는 참으로 힘든 모양이다. 나 역시 초심을 잃었었다. 처음 의원 선거에 나섰을 때 나의 두 가지 공약 중 하나는 ‘3선 이상은 안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4선을 앞둔 시점이 되었을 때 심한 갈등을 느꼈다. 이름을 날리겠다는 욕심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당시 정치자금 수사가 끝나지 않아 상당히 곤혹스러운 입장이었다. 만약 입후보하지 않을 경우 사람들은 불법자금을 썼기 때문이라고 단정할 터였다. 내게 뒤집어씌운 모든 의혹을 인정하는 꼴이 되고 만다.
온갖 어려움 속에서 41선거구 예비선거에 일단 등록을 했다. 예상했던 대로 선거운동은 악전고투였다. 상대 후보는 내가 곧 감옥에 갈 것처럼 흑색선전을 늘어놓았다. 선거운동은 시작됐는데 선거구에 가지 않는 조건으로 FBI 조사를 끝냈다. 이런 마당에 무슨 수로 선거에 이길 수 있겠는가. 분노가 치솟았다. 결국 득표 순위 2위로 패배했다.
선거를 치르는 중 나는 정치자금 사건을 경범죄로 종결짓는 ‘플리바겐(plea bargain·사전형량조정제도)’을 마지못해 수락했다. 더 이상 싸울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경범죄는 기록에 남지 않는다는 변호사의 끈질긴 설득에 굴복했지만 그토록 힘든 시간을 견뎌놓고 왜 마지막 순간에 양보했는지 지금도 나 자신을 용서하기 어렵다.
연방의원을 세 차례 하는 동안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본회의 참석률 100%에다 최다발언의 기록을 남겼다. 선거가 끝난 후에도 끝까지 마무리를 잘해서 ‘우수의정상’도 받았다. 성공한 이민자들에게만 주는 ‘엘리스 아일랜드 명예훈장’도 수상했다. 뒤돌아보면 분에 넘치는 영예를 누렸다. 하나님께서는 이 즈음에서 내가 마무리하기를 원하시는 것 같았다.
다른 인종, 다른 문화 속에서 주류가 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그 첫 번째 인물이 되어 겪어야 하는 어려움은 당사자가 아니면 설명하기 힘들다. 내 뒤로 연방의원이 될 후배들은 나를 징검다리 삼길 바란다. 내가 겪은 불이익과 고난을 훌쩍 뛰어넘어 한국인의 힘을 널리 펼쳐줬으면 좋겠다. 그것이 최초의 한국계 미 연방하원의원을 지낸 나의 유일한 소원이다.
이후 나는 ‘정치인 제이 킴’을 버렸다. 섭섭했지만 홀가분했다. 성공에 대한 집착과 욕망을 털어버리고 모든 걸 비웠다. 그리고 새로운 도전거리를 찾아 나섰다. 3선의 미 연방하원의원을 지낸 경험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더 늦기 전에 나의 경험을 조국의 젊은이들에게 돌려주자.’ 또 다른 출발선 앞에 서자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러 언론에 칼럼도 쓰고 인터뷰도 하고 강연도 다니며 책도 썼다. 한국의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내가 경험한 실제 미국정치를 한국정치와 제도적으로 비교하면서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구체적으로 그려졌다. ‘김창준 정경아카데미’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정리=박재찬 기자 jeep@kmib.co.kr